다큐멘터리 영화 ‘언더그라운더’와 책 ‘노동의 배신’에 등장하는 우리의 이웃들
시사인 기사를 몰아서 보고 있습니다. 이번 주 잡지가 도착했는데, 아직 못 읽은 기사가 많아 늘 그렇듯이 사무실에 가져와서 쉬는 시간에 읽었습니다. 시사인은 매일 아침 일어나 제일 먼저 들르는 화장실에서 몇 꼭지 씩 읽는데, 농사 땜에 무주에 가는 주말이면 이틀이 비어 못 읽는 기사가 많아집니다. 간혹 시사인에서 추천하는 책 정보도 얻습니다. 여기에서 얻은 정보로 구입했는지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지만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을 다 읽은 날에 시사인의 기사 ‘지하철 멈춘 자리에서 마음이 덜컹거린다, 이상원기자’를 읽었습니다. 두 기자(바버라 에런라이크도 기자라고 합니다. 그녀가 저임금 일자리를 체험한 후 그 기억을 정리한 내용의 책이 노동의 배신입니다)의 글에서 공통의 관심사가 된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우선 이상원 기자의 글입니다.
‘땅 아래’와 ‘비주류’라는 뜻을 가진 ‘언더그라운더’라는 제목은 중의적 제목이다. 카메라가 가장 집요하게 관찰하는 이들은 지하철역 청소노동자들이다. 김정근 감독은 현장에 가서 이들을 촬영할 때마다 가슴에 남는 게 있었다고 한다. “조금만 일을 하지 않아도 금방 티가 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정말 열악한 현장에서 일하고, 잠깐 쉴 때는 20명이 모로 누워 잠든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취급받는다.” 그런데 영화 속 청소 노동자들은 서러움을 토로하지도 불만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얼굴에 생기가 돈다. “예전엔 청소한다고 남들에게 말도 못 했는데, 지금 우리는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 청소하는 사람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자신의 몫이 충분하지 않다며 정규직을 향해 무언가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일이 고되지 않거나 대우가 좋아서가 아니다. 다만 이들은 뭔가 억눌려 있거나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다음은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노동의 배신’에서 쓴 글입니다.
매일매일 정기적으로 그리고 안달할 필요도 없이, 일하는 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백 가지의 일들이 누군가에 의해 해치워진다. 고도로 양극화되고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시각적 특성 때문에 빈민들은 경제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미국 사회에서) 가난한 싱글맘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는 대신에 복지 혜택을 받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던 과거에 중산층과 상류층은 그들을 혐오하거나 답답하게 느꼈다. 그러나 정부의 ‘공짜 지원’이 대부분 없어져 절대다수의 빈민들이 월마트나 웬디스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을 못마땅해하고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더 이상 옳지 않다면 어떤 관점이 바람직할까?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사회적 동의에 의해 ‘워킹 푸어(working poor)’라고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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