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파와 갈릴레이의 논쟁과 과학실험의 유익성
지금부터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재미있게 과학을 설명하는 재치 넘치는 글재주가 있는 리언 레더먼이 지은 ‘신의 입자’를 읽다가 든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책에서 가져왔다. 이후 전개한 글이 논리의 모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먼저 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과학자들은 순수한 사고만으로 답을 냈다. 지동설과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 그리고 종교에 관한 사상은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와서 수 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시대에는 고대 그리스식 탐구 방식이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순수한 사고만으로는 답을 낼 수 없는 문제가 도처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는 뛰어난 과학자의 시대이자, 뛰어난 관측장비의 시대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은 물체가 무거울수록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물체의 속도는 시간에 비례한다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 의견이 틀렸다고 했다. 현실에서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찰이나 공기저항 같은 방해 요소 때문이고, 만약 방해 요소를 제거하면 자연의 근본적인 상호관계가 보인다는 것을 증명했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증명한 방법을 보자. 그의 천재성이 보인다.
일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고 가정하자. 여기 무거운 공(A)과 가벼운 공(B)이 있다. 이들을 동시에 떨어뜨렸을 때 A가 B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것은 A가 더 빠르게 가속된다는 뜻이다. 이제 끈을 이용하여 A와 B를 하나로 묶는다(A+B).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면 이 경우에도 B는 천천히 떨어질 것이고, 둘은 하나로 묶여 있으므로 B가 물귀신처럼 A의 낙하를 방해하여 결국 A+B는 A 혼자 떨어진 경우보다 늦게 땅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잠깐! A+B는 하나의 새로운 물체이며 그 무게는 A보다 분명히 무겁다. 그렇다면 A+B는 A보다 빠르게 떨어져야 할 것 아닌가? 이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A와 B가 바닥에 동시에 도달해야 이런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어떤 가정을 내세워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알고 피사의 사탑에서 갈릴레오는 자유낙하가 물체의 질량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사실을 공개된 장소에서 실험으로 입증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은 잊지 못할 교훈을 얻었다(일부는 이를 박박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이제는 법원의 판결 얘기를 좀 해보자.
재판은 법과 양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된 결과가 차이가 많다. 소위 양형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법원은 나름 양형의 기준을 정해 놓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양형이 비슷할 듯한 사건에서 엉뚱하게 판결이 기울어져 나오는 것은 왜 일까? 법원은 법은 일정하지만 법관의 양심이 개개인의 철학과 세계관에 의해 조금씩 달라서 그렇다고 합리화한다.
이런 법원의 설명을 나는 지금 읽은 글로 반박을 하고자 한다. 법에 의한 판결은 일정한 법칙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판결이 들쭉날쭉한 것은 판결의 균형을 방해하는 방해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법관의 세계관, 양심 같은 듣기 그럴듯한 것도 있지만, 선입견, 편견, 앙심, 복수심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법원은 반대할 것이다. 죄의 양태는 비슷하지만 죄인마다 그 성향과 행태가 달라 죄질이 나쁘거나, 개전의 정이 없어서 법관이 양심을 기준하여 판단하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질과 개전의 정도 사건마다 분류하면 그 기준이 보일 것이다(개전의 정이란 죄인이 유죄임을 전제한 것이다. 만약 무죄라면 그의 무죄 주장은 개전의 정이 1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런 논쟁은 생략하자)
법원의 설명이 일단은 옳다고 가정하자. 여기 무거운 죄와 가벼운 죄가 있다. 당연히 무거운 죄에는 양형이 무겁고 가벼운 죄는 양형이 가벼울 것이다. 그런데 무겁고 가벼운 죄의 판결이 이상할 때가 있다. 그러면 죄질을 따지고, 죄인의 개전의 정을 보아야 한다. 이를 분류하면 몇 가지의 구분이 가능하다. 무겁고 가벼운 죄 2가지, 곱하기 죄질이 나쁘고, 가볍고, 그 중간의 죄 3가지, 곱하기 개전의 정이 있고 없고 2가지를 전제하면 2*3*2=12가지로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법원의 판결문을 검색해서 12가지로 구분하여 양형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아뿔싸, 그런데 그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 법원이 모든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제안하여 양형의 균형을 확인하는 실험을 하자는 사람은 갈릴레오가 될 것이고, 법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될 것이다. 갈릴레오에게 이를 박박 갈며 복수를 다짐한 사람들이 있듯이 다음 판결에 갈릴레오 추종자들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댈지도 모른다는 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
법원의 모든 판결문을 공개하고 이를 연구하여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지를 실험하는 과학정신이 필요한 시절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전유죄, 무권유죄, 앙심판결, 편견에 사로잡힌 판결이라는 비판이 끊이질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검찰의 기소독점에 따른 폐해가 공수처라는 대안으로 나오듯 법원의 판결에 대한 검증이 다음 과제가 될 것은 법원에게 달렸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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