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소외론
살다 보면 공허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경우가 잦습니다. 긍정적으로 산다고 하는데, 배신을 당한 듯 삶은 부정적이고, 사람들은 나를 피하고, 나는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합니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로 떠돌다 보니 영혼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럴 때, 소외를 느낍니다. 소외의 원인을 나는 공허한 말에서 찾습니다.
1. 묵언 수행
창세기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소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빛!”하시니 빛이 생겨났다.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하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본떠 우리를 만드셨고,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변명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부끄러운 짓으로 인하여 먹고살기 위하여 땀을 흘리는 수고와 출산의 고통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진정한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하는 곳에서 보람을 찾는 경우도 있고, 출산의 고통은 새 생명을 갖는 희열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말은 참말이 아니어서 세상을 바꾸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은 원죄로 인하여 믿을 수 없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구업을 두려워하여 묵언 수행을 하는 모양입니다. 구업은 말로서 짓는 업보를 말하는 것인데, 생명의 힘을 잃은 말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현혹하여 고통을 만들어 내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게지요. 원죄와 구업은 이렇게 연결된다고 봅니다.
2. 종교인의 말 그리고 행동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가톨릭 성직자들의 아동 성학대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 대 이후 6개 가톨릭 교구에서 벌어진 아동 성추행과 성폭행 사례를 보면 가해 성직자만 300명, 피해 아동은 1천 명이 넘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자들이 벌인 범행은 교인들을 교회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킵니다.
“하나님 까불지 마!”라는 자칭 목사는 선동꾼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은 말속에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추종하는 자칭 신도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은 사회와 분리되고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소외감은 이 사회와 정권에 대한 분노로 분출됩니다. 법을 무시하는 근거로 삼고 불법의 난무 속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들이 찾는 하나님은 그들의 협박에 꼼짝하지 못하시고 까불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는 안 계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면 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란 애초에 없었을 테니까요.
이렇듯 말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그 말을 쏟는 인간의 소외가 발생합니다. 직장에서 자신의 의견이 묵살될 때 우리는 직장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육체와 정신의 존재감이 상실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의 말이 묵살될 때 아이들이 소외를 느끼고, 직장을 잃어 경제력을 상실한 가장의 말은 가정에서 힘을 잃어버리고, 소외됩니다. 소외된 가장은 집에서 쫓겨나, 육체의 고립감과 정신의 황폐를 경험하기도 한다네요.
말이 힘을 되찾고 그래서 소외를 극복하려면 말을 신중히 하고,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원칙입니다. 예외가 없는 원칙입니다. 정치인은 선의의 거짓말을 밥 먹듯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인의 말에 예외를 둔 것은 정치인의 특성을 감안한 합리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들이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이 존재함에도 실제로는 권력자가 따로 있을 뿐, 국민이 주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국민은 나라와 분리되고 소외되었던 것입니다. 소외되지 않았던 자는 권력자뿐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고 합니다. 우주는 균형이 있지요. 빅뱅이 일어나도 우주는 균형을 유지합니다. 인간이 하나의 우주로 존재하려면 존재감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인간의 존재감은 하는 말과 그 말에 맞는 행동,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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