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공과 : 불가능에 도전하기(로마서 12:14~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9~21)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도 실패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니까 한 번 더 도전해보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애썼던 경험이 있습니까?라고 교재에서 묻습니다.
최근 군 내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에서 사건을 알리고 피해대책을 강구해달라는 요구를 하던 분이 오히려 가해자와 군 내부 관련자들의 협박과 회유에 절망하여 자살을 택했습니다. 대통령이 지휘계통까지 모두 수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그제야 참모총장이 옷을 벗고, 수사라인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되었습니다. 꼭 죽어야 마지못해 대처하는 모습의 반복이 안타깝습니다. 죽은 이 중사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주님의 원수 갚음은 꼭 극단적 선택이 필요한 걸까요?
다락방 공과의 제목이 ‘불가능에 도전하기’입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약간은 이해가 됩니다. 세상이 하도 불공평한 시절 유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젊은 병사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빽’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빽’ 있는 놈들은 모두 징집에서 빠지고 ‘빽’ 없는 집 자식들만 전쟁에서 죽더라는 풍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빽’ 하고 의탁을 하였습니다. 독재정권에서는 빽이 있어야 취직도 하고 출세도 했습니다. ‘줄 잘 서라’는 요구가 공공연 했습니다. 차별과 냉대를 겪었던 ‘줄 잘못 선’ 필부필녀들의 삶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부모님의 줄을 어찌 선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군대에도 공정하다는 수사기관이 있고, 군법회의라는 특수한 사법제도가 있건만 아직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빽’ 없는 군인은 숨 가쁜 피해를 입었음에도 수사기관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지만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는 경우에는 죽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억울함을 알릴 곳도 알아주는 곳도 없는 경우의 선택이라 어렵게 이해라도 하고 싶지만 악에 대항하는 방법이 너무 절망적이라 옳은 선택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발을 했는데도, 수사기관은 수사를 하지 않고, 가해자들은 편을 먹고 협박과 회유를 합니다. 군대에서 떠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죽어도 싫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피해보상도 없이 악의 무리에 허무하게 패배하는 선택은 죽기보다 싫었을 것입니다. 악의 무리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집요하게 피해자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결국 최악의 선택으로 악을 응징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지 않은 결과, 우리는 아까운 청춘 한 분을 잃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로서 삶의 보존을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는 선택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맡길 수 있는 방법을 우리의 생존을 위해 찾아야 하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같은 아픔을 느끼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이 중사 사건과 같은 종류의 피해를 보신 분들도 많습니다. 이들을 도왔던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피해를 알리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고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지 우리 사회에는 어려운 상황에 빠진 억울한 분들에 대한 감수성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공분이라는 것도 작용을 하지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도록 같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아직도 ‘빽’과 ‘줄’을 얘기하는 늙은 꼰대도 젊은 꼰대도 여기저기 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힘을 믿고 힘차고 끈질기게 그들을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싸움은 하되 다음에는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 것을 목표로 싸워야 합니다. 가해자를 미워하기만 하고, 복수만을 생각하면 내가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말씀이 조금 귀에 들어옵니다. 먹이고 마시게 하는 것이 뭐 그리 힘들겠습니까? 죗값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받는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의지하는 것이 소극적이든 적극적인 의미이든 피해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의 상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면 저는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고, 원수를 사랑하되 그 죄과를 엄중히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죽어 존재한다는 천국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오늘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 곳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천국이 되어야 하니까요.
이 중사의 명복을 빕니다. 원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곁에서 영면하시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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