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누가복음 6:27-38)
지금은 거의 없어진 손편지를 받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편지를 받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책의 한 구석 글이 해답을 주었습니다. ‘편지를 받고 싶으면 먼저 편지를 쓰시오’
편지를 쓰는 요령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책이 알려주는 대로 먼저 날씨와 함께 안부를 묻고 나의 안부를 전합니다. 날씨에 얽힌 나의 감정을 같이 알려주면 더욱 좋을 듯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편지를 쓴 목적을 썼습니다. 말로 전하지 못한 마음의 정감을 글로 보낸다는 내용입니다. 전하지 못한 아쉬움도 전하고, 앞으로는 얼굴 보고,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도 글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목적인 너의 답장이 기대된다고 썼습니다. 그리고는 이별의 말을 전하고 편지를 끝냈지요. 대개 보낸 편지의 답장은 십중팔구 왔고, 연이어 나도 답장을 다시 썼습니다. 글씨체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처음에는 그렇게도 어려웠던 편지글이 조금씩 수월해지고 유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의 글이 유려해지려면 당연히 유치했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 이런 훈련을 거친 후, 학급의 연애편지는 대개 제가 맡았습니다. 편지글 하나에 쉬는 시간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제공받는 조건이었으니 글값이 제법 비싼 축이었습니다. 아닌가요?
세상의 이치는 ‘기브 엔 테이크’이고 ‘대접받은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이치는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받은 대로 주는 것’과 ‘받고 싶은 대로 주는 것’의 차이를 몰랐습니다. ‘받고 싶은 대’로 주어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받고 거기에 상응한 보답을 하는 것과 내가 받고 싶어서 먼저 주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보답이 없을 때 우리는 무언가 손해를 본 듯한 상실감에 기분이 나빠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받고 싶은 대로 주지만, 비록 받지 못한다 해도 이를 마음에 두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쓴 편지의 목적은 편지를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중팔구는 답장을 받았지만 못 받은 답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못 받은 편지에 연연해서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답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만약 단 하나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면 아마도 상심을 했겠지요.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좀처럼 받고 싶은 대로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압니다. 언뜻 손해볼 일처럼 보여도 그것이 반드시 손해는 아니라지요. 하나님의 이치는 오묘합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는 말의 뜻도 폭력과 갈취를 그저 당하고만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다만 똑같이 보복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받은대로 주지 말고, 내가 받고 싶은 대로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쉬운 듯 어려운 말씀이고 삶에서 그대로 행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갈비집 사장입니다. 주방장이 하도 게을러 열심히 일을 하라고 꾸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주방장이 앙심을 품고 손님들이 갈비를 1인분 주문하면 2인분을 주었습니다. ‘너 한 번 망해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모르고 있었지요(만약 알았다면 제가 그 주방장을 그대로 두었을까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손님들이 줄을 이어 저희 가게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손님들로 고기를 대는 가게 사장은 더욱 좋은 고기를 싸게 공급하기 시작했고, 주방장은 계속 ‘애라 망해라며’ 고기를 넉넉히 주었고, 직원들이 퇴근할 때, 너무 고마운 나머지 저는 꼭 택시비를 주어 퇴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게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이 이야기는 제가 들었던 서울 중구 소재의 모 갈비집의 실제 사례라고 합니다. 주인이 택시비를 주어 퇴근을 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게가 잘 되는데 직원에게 박하게 대할 사장이 어디 있으랴 싶어 덧붙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이치는 우리의 계산과는 다른 세상을 숱하게 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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