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오늘묵상

오늘의 묵상 :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인가 (다락방교재 로마서 9:14~29)

무주이장 2020. 10. 23. 14:10

오늘의 묵상 :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인가   (다락방 교재 로마서 9:14~29)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신다고 하면 타락한 우리의 생각으로는 반발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에 바울 역시 사람임에도, 누구나 오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선포함에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아멘(17~23)

 

 바울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성령이 못하게 하셔서 바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마게도냐 사람이 현몽하여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자기들을 도우라는 요청에 응하여 이는 곧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고는 바울이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로 갑니다. 하지만 마게도냐의 초입 빌립보에서 귀신 들려 점을 쳐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점쟁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그의 영험을 없애는 바람에 고발되어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매 옥의 죄수들이 모두 듣고는 놀랐습니다. 때마침 지진으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려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고, 이를 본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하면 자신에게 벌이 내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자결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간수를 말려 우리가 모두 옥 안에 있다며 안심을 시킵니다. 이에 간수는 바울에게 감복되어 구원을 받는 방법을 묻고 바울이 그의 가족들과 그 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음식을 차려서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람을 택하십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십니다. 내가 기도로 갈구하고 원해서가 아니고, 내가 죽도록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의 노력을 보고 감복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셔서 그리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이러한 말씀을 어찌 수용할 수 있을까 반문하고 또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나의 마음대로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우주가 부응하여 나의 꿈을 이뤄주지 않는다는 것을 수 차례 경험하고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다만 나는 나의 일을 성실히 꾸준히 지치지 않고 할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제 요나서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한 니느웨 지역은 북이스라엘을 패망시킨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강제적인 이주정책을 펴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사마리아지역이 앗수르에 의해 파괴된 후 유다인들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에 의해 강제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비록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아들여 예배하기는 했지만, 이를 그들이 믿고 있던 다신교적인 신앙과 혼합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온전한 유다인도 온전한 이방인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배척했다고 합니다. 요나는 원수의 심장인 니느웨 지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미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혹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라도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요나에게는 불의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결국 풍랑 속에서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 갇히게 되고, 이후 자신의 불복을 회개한 후에야 다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결국 억지로 니느웨 지역으로 파견을 간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요나가 염려한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니느웨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나는 기뻐하기는커녕,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가 앗수르를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아마도 자신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괴롭히고 멸망시킨 원수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악독한 앗수르는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배역의 족속들을 낳고 기른 원흉인 것을 어찌 회개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분노가 내려 멸망해야 할 족속 들일뿐이다 수십 번을 스스로에게 세뇌했을 것입니다. 물고기의 뱃속에서 지내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하나님에게 다시 서원을 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풀려나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채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뒤에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곧이어 하나님이 그들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는 억울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 바울과 뜻을 어긴 요나는 모두 자기의 뜻과는 다른 상황에서 고통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게 됩니다. 순종한 바울과 순종하지 않은 요나의 결심과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뜻으로 수렴합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내년부터 일만 성도 파송운동을 하게 됩니다. 25,000명의 성도들 중 기존 교회에는 5,000명 미만의 성도들만 남고, 다른 성도들은 기존 교회 내 부목사님 15분과 외부에서 초빙한 15분의 목사님이 새로이 개척하는 교회 30군데로 옮겨가는 운동입니다. 만약 5,000명을 넘는 성도들이 파송을 거부하고 기존 교회에 남겠다고 한다면 목사님은 직을 내려놓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의 뜻을 보시고 행하는 파송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쪽을 가던 여러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뜻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는 쪽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확신이 있어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자신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합니다만, 우리 완악한 사람들은 의심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의심으로 인해 건강한 교회가 되기도 하고, 교회가 깨어져 나뉘기도 합니다. 무엇이 참인지 현실의 잣대로는 미래를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선한 뜻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면, 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면, 현실의 기준에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면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과 고난은 믿음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지 우리는 주권이 없는 토기장이의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깨어질 그릇이고, 개 밥그릇으로 사용된다고 해도 제가 무어라 하나님께 달려들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로마서 9:20) 이 구절을 한때는 인간이 노예로 전락됐구나 라고 비판했지만 복잡한 세상살이를 해보니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공평하신 분은 아니구나.' 긴 호흡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야만 알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든, 그렇지 못하든 결과는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갑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