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역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5~6)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네의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바울을 불신하고 교회가 분열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성적 타락과 은사의 남용, 예배의 무질서, 계층 간의 갈등, 몸의 부활 부정 등의 문제가 있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방편 중의 하나로 서신을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힘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신앙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경우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는 중에 생기는 문제로 인하여 종교인이 조롱을 받거나 질책을 받는 일이 더 많은 시대입니다. 그러면 위의 고린도후서의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요.
우선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통이란 것이 반드시 모든 사람이 겪는 필연적인 일이냐는 것에 의문을 가집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면서 인간이 이러한 고통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을 명상을 거친 후 답을 얻으시고 고통이 더 이상은 없는 해탈의 과정을 몸소 겪으시고는 그 경험을 중생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느낄까요? 돈과 건강 그리고 건전한 철학을 가지면 인간사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사회의 약자인 병자와 과부와 세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고통을 하나님이 위로하신다고 다독이셨습니다. 자기의 목숨까지 내던지시면서 모든 사람들의 원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람들과 화해하실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유, 그리고 이웃들과 화평하면 예수님의 구원과 함께 우리는 행복하기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같이 인간의 고통의 근본 원인을 해소할 수 있는 해답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약간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인간의 고통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시다 슈의 책을 읽으니,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기간에 모든 것이 가능한 전지전능의 완성감을 느끼다가 점차 부모로부터 유리되어 타자와의 교류를 시작하면서 결핍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고통을 느끼고, 주어진 삶의 조건에 적응하느라 아픔을 느낀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의 고통은 태생적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태생적인 고통은 없앨 수는 없지만, 이런 사실을 완벽히 이해한다면 고통을 이해하고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억지로 논리를 끌어온다면 사람들의 고통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어진 조건이다는 것을 가설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도로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 환난을 당했고, 그런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결국 환난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까지 고백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제 고통의 원인과 그 과정과 해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고통과 환난과 결핍감과 절망감을 이해하고 하나씩 대응하면서 생물학적인 건강과 경제적인 여유를 찾으면 우리는 주어진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설계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제 스님의 도움과 목사님의 설교는 필요할 때 찾아, 보고 들으면서 설계도를 조금씩 수정하면서 살면 될 듯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한 분이 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중 어떤 여자분이 스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제 건강을 위해서 피트니스 클럽을 다니는데, 건강도 좋아지고, 몸매도 젊은 시절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클럽에서 제게 친절하게 도움을 주는 많은 남자들을 만나는 것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저는 이대로 살면 아무런 고통도 없이 즐겁기만 할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살고 있는 건가요?” 뭐 대충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예, 즐겁기만 하면 그대로 사시면 됩니다.” 스님의 답변이 나오자마자 질문한 여성분이 “예”하며 흥겹게 대답했습니다. 모두가 유쾌하고 경쾌한 여성분의 대답에 웃었습니다. 스님도 아마 빙그레 웃었겠지요. 그러면서 스님이 혼잣말을 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몸매와 건강을 행복의 원천으로 생각하다 덜컥 교통사고라도 나서 팔이라도 하나 절단한다면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하겠누.” 스님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교통사고를 예를 들면서 그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우리 마음대로 만들까를 걱정해야 합니다. 스티븐 킹은 11/23/63이라는 소설에서 과거로 돌아가 잘못을 잡으면 어떨까를 짐작했습니다.
결국 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온 듯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주어졌다. 이를 완화하고 대비하기 위하여 우리는 적절한 생활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고, 이를 수정할 수 있다. 이에 맞게 행위를 연속하면 된다. 그런데 그 설계도대로 연속적 행위를 하며 행복을 만끽하는 과정 중 설계도에 없는 미래의 불확실하고 미확정된 사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대처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린 설계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주관적 객관적인 방편들로 인하여 행복의 조건이 결정되어있고, 이로써 행복의 조건에 대한 선입관이나 주관이 확고해졌기에 이에 어긋난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곧장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역의 핵심은 인간을 자신의 연약함과 직면케 하는 것이요, 동시에 그 연약한 인간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다."(정성국, 매일성경, 고린도후서: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보냄받은 사람들 중에서 인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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