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말씀과 현대인의 소외

무주이장 2018. 7. 9. 11:54

말씀과 현대인의 소외

 

 

 프리츠 파펜하임의 ‘현대인의 소외’라는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내 삶의 주체로서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혹 답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1979년 11월 30일 삼판을 인쇄했고 책값이 1800원이라고 책의 마지막 장에 표시가 있다. 39년 전 책이다. 20살이었을 때, 그 때도 나는 소외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 책을 책장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당시 이 책에서 답을 얻지 못한 기억이 생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읽으면 혹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기억 속의 책을 현실로 끌어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책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소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만 둔 전 직장에서의 경험이다. 부동산 개발사업을 시작한 회장의 사업이 의외의 성공을 거두면서 춘천의 별장으로 직원을 초대했다. 요즘 말로 하면 1박2일의 MT이고, 다른 말로 회식이었다. 거나한 저녁을 먹고 강변 모래사장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회사에 건의할 것이 있으면 듣겠다는 자리를 만들었다.

“전 저의 모든 인격을 걸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경험의 부족이나 지식이 모자라면 질책을 달게 듣겠습니다. 그렇지만 직원을 믿지 못하는 것은 힘 빠지게 합니다.” 내가 보고하는 내용을 교차해서 확인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맥이 풀렸던 기억을 상기한 것이다. 하지만 반응도 없었고 그 후 달라진 것도 없었다. 지금은 사업을 하는 사업주의 의심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젊은 그 때, 직원 모두를 도둑으로 생각하는 사업주는 나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그러고도 10년을 조금 넘게 그 회사를 다녔다.

 

 

 ‘말씀은 존재가 되는 능력 뿐 아니라 또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능력도 있습니다’(준비된 선물. 김민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1장3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빛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또한 지금도 이 빛은 밤과 낮을 비추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꿈틀대며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살아계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시고 말씀대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배약하는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고 때로는 벌을 내리시지만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소외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점에서 소외의 이유를 ‘말씀’에서 찾았다. 인간의 존재는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다. 영적이든, 지적이든 사유하는 존재이고 이러한 영적, 지적 사유물은 말로 존재한다. 사람의 말이 언제부턴가 말을 한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별개의 존재로 돌아다녔다.

 

 

 교단의 목사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숙소로 젊은 여인들을 불러들여 ‘강간’을 하였다. 반도체 기술을 자랑하는 말이 국민들의 가슴에 자부심으로 울려 퍼질 때 반도체 공장의 근로자는 직업병으로 다수가 죽어갔다. 전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말로 취임한 대통령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분리하고 차별하고 고사시키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동원했다.

 

 

 말은 존재며 지속이다. 나는 목사의 말로 목사를 존경했고, 자랑의 말 때문에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뉴스를 보면서 대통령의 격무에 뿌듯했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가의 동량들을 미더워했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말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보람찬 일로 하루를 마감하며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목사는 강간범이었고, 회사는 근로자를 속이며 병든 자들을 돌보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민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거들내고,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며, 국가의 동량들은 초등학생이나 하는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로부터 모두 소외되었다. 

 

 

 사람이 하는 말이 그 존재와 유리되어 별개의 것으로 날아다닐 때 말과 분리된 사람은 소외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의 말이 그 육체와 분리되게 만드는 것은 기술일 수도 있고, 사회구조일 수도 있고, 정치체제일 수도 있다. 생존을 위해 말과 행동을 분리시키는 사회가 당연하다는 생각을 나는 강요받았다. 나는 소외를 느끼는 나를 20대에 느꼈고, 그 실체를 궁금해 했다. 이제 50대에 들어 소외의 원인을 ‘말씀’에서 찾았다. 이 세상의 행복을 얻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지금, 행복이 소외로부터 탈출이라는 것을 포함한다면 하나의 답을 얻은 듯하다. 조선의 선비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못할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소외된 삶을 원하지 않은 학자들의 깨우침이라는 생각에 놀랄 뿐이다.

 

 

 ‘인간의 소외는 현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운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대인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노동 영역에서 경험하는 소외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경향, 곧 인간의 신으로로부터의 소외의 나타남으로 보인다’(현대인의 소외. 프리츠 파펜하임)

 

 

 ‘죄의 본질은 신앙 상실, 신으로부터의 소외 상태, 신으로부터의 도주, 신에 대한 반역이다. ․ ․ ․ ․ 인간은 그 인격의 핵심에서 신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죄를 짓기 마련이다. ․ ․ ․ ․ 인간의 지적인 힘은 그의 도덕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왜곡되고 미약해진다. ․ ․ ․ ․ 도덕적 노력에 의해 궁극적인 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지적 노력에 의해서도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노력을 하는 사람은 소외를 깊게 할 뿐이다.’(현대인의 소외 중, 폴 틸리히)

 

 

 

 현대인의 소외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약한 것으로부터 기원하고,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으면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폴 틸리히는 말씀이 아니라 ‘신’에게서 찾은 것은 그의 신앙이 깊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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