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비판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기준
세상을 살면서 내 눈에 꼴사나운 것이라면 숱하게 비판을 했고, 욕을 해댔다. 젊은 시절 철없이 교만했던 나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니 그 도가 심하였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들인 습관이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이어졌으니 그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두기는 불편한 습관이다.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중 건전한 비판에 대한 말씀이 있어 정리를 해둔다.
로마서 2장에는 남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있다. 1절~4절이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사람이 살면서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것이 정의라고 배웠다. 불의라는 것의 기준이 상식을 기준하면 어렵지 않으면서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지식의 분류를 하다보면 막상 기준이 선명하고 분명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다른 기준을 주장하며 전쟁까지 불사하는 것인 줄도 모른다. 성경의 말씀에 기준하여 건전하지 못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첫째, 교만하여 남을 비판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비판이다. 교만은 만병의 근원이다. 모든 일은 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고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적으로는 최악의 죄라고 한다. 피조물이 창조물의 지위를 넘보는 행위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분류하여 내가 너보다 더 알기에 너를 비판하고, 내가 너를 판단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니 너를 비평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이런 비판이 비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쉽게 수용되지 않는 이유다.
둘째, 남에게는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대던 사람이 자기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비판도 건전하지 못한 비판이다. 남에게는 간음하지 말라던 목사가 하나님의 뜻이라며 신자를 간음하는 것이 얼굴 붉어지는 잘못된 비판의 예다.
그렇다면 어떤 비판이 건전한 비판일까?
첫째, 상대를 긍휼하게 생각하며 비판하는 것이 건전한 비판이라고 한다. 성경은 인간을 긍휼히 생각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엄한 분노의 벌을 내리시는 모습의 기본에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식들에 대한 긍휼이 기본적으로 내면적으로 깔려있다(사실 난 아직 이런 하나님의 엄한 분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말씀을 좇아 남을 비판한다는 것에는 긍휼을 수반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비판을 할 수 있겠나. 그것은 미움의 표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둘째, 비판이 상대를 깨우치고 살리는 것이라야 한다. 결국 첫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사랑하기에 비판에는 잘 벼려진 칼이 들려있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펄떡펄떡 살아있고, 비판하는 사람의 진심이 오롯이 전달되어 상대를 깨우치고 살려내는 것이다.
사람은 비판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건전한 비판으로 사람이 바뀐 듯 보이지만 결국은 사랑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건전하다고 생각을 하고 남을 비판했음에도 나중에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후회를 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조심할 일이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2015.6.25 '건강한 비판의 회복"설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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