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교수와 윤여준 전 장관의 생각 비교
한국경제에 이병태 교수가 “헬조선이라 빈정대지마라...부모들은 모두 울고 싶은 심정”이란다 라는 기고문을 올린 모양이다. 단체 카톡에 올리신 분이 있어 그의 글을 접했다. 한편 오늘 한국일보에 실린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두 분의 생각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병태 교수는 카이스트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모양이다. 약력을 보니 대학교수, 기업인으로 표기되었다. 윤여준 전 장관은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두 분의 이력이 다르니 생각도 다른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두 분의 소신과 삶을 대하는 철학을 볼 수 있을 듯하여 비교해서 글을 정리해본다.
이교수는 젊은이들이 이 땅을 헬조선이라고 할 때 조부모와 부모를 바라보라고 한다. 힘들게 살았던 조부모와 고생했던 부모님의 삶을 밭 매고, 쇠풀 뜯고, 식모로 보내진 어머니와 딸을 보내고 눈물짓던 할머니를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윤장관은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인터뷰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할 말은커녕 사과부터 해야죠.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나라를 물려줘서……. 지금 젊은 사람들, 얼마나 암담하면 ‘헬조선’이라고까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젊은 친구들을 만나 얘기해보면 이 나라에 정말 희망이 있다고 느껴져요. 똑똑하고, 정신도 바르고요. 조금만 길이 열리면 모두들 일당백을 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해요. 형편이 어려운 사람한테 이런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한번 최선을 다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저는 속담은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어요.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믿고 바늘구멍을 찾아보세요. 반드시
있어요!”
한 분은 자기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젊은이들에게 자기도 이루었으니 여러분도 생각을 바꾸라고 한다.
“사람들은 내가 미국 가서 박사하고 KAIST교수하고 반기업 정서에 대응하니까 무척 금수저인 줄 아는 가 보다. 나는 위에 적은 일들을 직접 경험했고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신들처럼 그런 배부른 소리를 못할 뿐이다. 나는 부모 모두 무학으로 농부의 아들이고, 그 것도 땅 한 평 없던 소작농의 아들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 등잔과 호롱불로 공부했다. 나보다 더 영특했던 우리 누이는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으로 취업해 갔고, 지금까지도 우리 어머님의 지워지지 않는 한이다. 나는 대학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내 생활비를 마련하며 다녔고, 때로는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면서 다녔다. 나는 돈 한 푼도 없이 결혼했고 집 없는 설움을 겪으며 신혼 초에 치솟는 전세값 때문에 서울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단돈 3백만 원으로 가족을 데리고 유학을 가서 배추 살 돈이 없어서 김치를 만들어 먹지 못했고, 내 아내는 남의 애들을 봐주고, 딸은 흑인 애들이 받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서 우유와 오렌지 쥬스를 사 먹이면서 학교를 다녔다. 나는 회사에 취업해서 주 6일을 근무하던 때에 입사 첫해에 크리스마스 날 단 하루 쉬어 보았다. 공장 창고의 재고를 맞추려고 퇴근 안하고 팬티만 입고 냉방도 안 되는 높다란 창고 위를 기어올라 부품을 세면서 생산을 정상화하려 애썼다. 그렇게 야근하는 날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삼겹살인줄 알고 살았다. 그렇게 살아 왔기에, 무책임한 노조가 망가뜨리는 회사를 보아왔기에, 우리보다 잘사는 것으로 알았던 많은 나라들이 꼬꾸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어떻게 잘 사는 사회인지 보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처럼 아프다고 못하고 힐링 해야 한다고 응석을 부리지 못한다.”
어린 시절 무학의 부모님을 만나 땅 한 평 없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그 보다 뛰어난 누이의 기회를 뺏어 대학교를 다녔고,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집안의 생활비를 보태며 어렵게 산 기억이 가슴 아프다. 그리고 결혼생활의 궁핍함과 유학생활의 결핍감을 아내와 딸까지 고생시킨 기억과 함께 상기한다. 주 6일 근무하는 것이 법으로 보호되던 시절임에도 일 년에 단 하루를 쉬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한 모습이 팬티만 입고 벗은 몸 그대로다. 야근 후 회사가 주었던 삼겹살이 그렇게 맛있었다는 것은 성취감의 표현일 것이다.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할 수 없는 그의 무력감도 느끼게 된다. 필리핀처럼 우리보다 잘 살던 나라라고 믿었던 나라들이 꼬꾸라진 것은 이제는 불만뿐인 노동자의 몫으로 읽힌다. 그래서 그는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아니 최소한 진실을 알기에 요즘의 젊은이들처럼 “아프다”고 못하고 “힐링 해야 한다”고 응석을 부리지 못한단다.
이에 비해 윤장관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평생 지키려고 했던 삶의 도가 있다면 무얼까요? 라는 질문에
“선친께서 주신 여러 가르침이 있는데, 뭉뚱그려 표현하면 이런 거예요. ‘일생을 일관된 정신으로 살아라. 정신이 일관되면 행동도 일관될 테니까.’ 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도 강조하셨죠. 어릴 때는 ‘최선을 다하라는 건 결과에 집착하라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나이 먹어 생각해보니 아니더라고요. 결과에 집착하면 비굴하거나 치사해지기 쉽거든요. 그러니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라는 거지요. 그래서 가능한 한 이걸 일관되게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내가 선친께 참 좋은 교육을 받았구나’ 싶어요.”
인터뷰 말미, 윤 전 장관은 “요즘 아버지 생각을 할 때가 많아진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내가 내 아버지를 그리워한 것만큼 두 아들도 내 생각을 할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고 덧붙였다.
운 좋게도 윤장관은 좋은 아버지를 두신 모양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가 많아진다고 하니 말이다. 천운으로 좋은 아버지를 둔 윤장관은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는 모양이다. 인터뷰이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만날 때마다 누구하고도 대화가 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연세에도 유연한 사고를 유지하는 비결이 뭔가요?
“지금도 30, 40대와 자주 만나고 또 함께 일하기도 하는데 아무 주제나 다 대화가 되는 게 신기하다고들 해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내가 뭘 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선친(한학자 윤석오 선생)께서 늘 그러셨거든요. ‘공부는 평생 하는 거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아서 겸손해지는 법이야.’ 30대 친구들과 얘기하다 깜짝 놀라기도 하죠.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으로 정치 현실을 분석할 때가 있거든요. ‘나보다 저 친구가 낫다’ 싶은 거죠. 그러니 정말 공자 말씀이 맞아요.”
이교수가 1960년생이니 우리나이로 59세이고 윤장관이 1939년생이더라. 21년의 나이차가 있음에도 두 분의 유연함에 다름이 있는 것은 이교수가 은퇴시기에 접어든 윤장관과 달리 우리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는 열정이 있어서 그럴까?
이교수가 젊은 시절 경험한 회사는 대기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 시절 대기업이 없었다는 말이었을까? 나도 1960년생이니 대기업을 보기는 보았으나, 아마도 대학으로 가는 바람에 대기업의 경험을 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교수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듯한 대기업을 뜻밖에 화제로 올린다.
“대기업이 착취를 한다구요? 한국에 일자리가 없어서 대학을 나오고도 독일의 광산 광부로 갔고 간호사로 갔던 그래서 국제미아가 되었던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의 이야기를 물어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라. 지금도 대학을 나오고도 대한민국에 불법 취업을 와서 노동자로 일하는 필리핀과 몽고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야기 하라. 신혼 초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두고 지하 방 반 칸이라도 마련해 보려고 중동의 뙤약볕으로 건설 공사장의 인부로 갔던 당신의 삼촌들을 보고 그런 응석을 부려라. 월남전에 가서 생명을 담보로 돈 벌이를 갔던 당신의 할아버지,삼촌 세대를 생각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라.”
지금 젊은이들은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재수, 삼수, 사수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대기업이 착취를 한다면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착취는 중.소 영세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상황이 정확한 현실파악일 터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이들 기업을 회피하고 대기업으로만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가. 전임 이대통령은 이런 젊은이들을 질타하였다. 이교수의 감정이입은 부모님과 누이, 아내와 딸에 이어 보다 범위가 넓어진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가 국제미아로 전락을 했다. 벌이를 위해 고국을 떠나 조국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한 이야기야 슬픈 일이지만 국제미아로 전락한 것은 조금 심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염려하는 모습은 기왕이면 저임금으로 내국인과의 차별을 구조화한 것까지 감정을 소비하였으면 좋을 일이다. 이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받는 급여가 자국으로 송금하면 어마어마한 돈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말이다. 젊은이를 나무라려니 신혼 초의 중동파견 근로자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슬픈 일은 아니었다. 나이 들어 가족과 헤어진 중년의 파견 근로자도 같이 염려해주면 좋았겠다. 그분들은 모두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계실 것이다.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했다는 자부심과 긍지 말이다. 우리는 그분들을 처참한 슬픔의 예로서 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들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교수는 젊은이를 가르치려는 열정으로 이분들의 삶의 처참함만을 예로 들었던 것 같다. 젊은이들의 응석은 이런 고생을 겪은 후에야만 가능한 것일까?
윤장관이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안철수와 관련한 질문이다. 전직이 기업가인 안철수를 평가하면서 우리 사회를 읽는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다.
-안 전 대표가 정치를 그만둘까요?
“그러지 않겠죠. 자신에 대한 환상이 있어 보여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 좀 없어 보인다는 거지요. 그를 겪어본 어느 분이 이렇게 표현을 하더라고요. ‘안철수에게는 공심이 없다’고. 말을 바꾸면 사심만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표현이 절묘하다고 생각했어요. 공심이 없으면 민주적 리더십을 가질 수가 없어요. CEO 마인드로는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이거든요. 자칫 과정이 지루하고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갈등을 다 조정하고 가는 거라서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가 효율적인 건데 말이죠. 안 전 대표는 (당을 만들고 나서도) 공조직의 의결사항을 사전사후 양해 없이 바꾸기도 했죠. 민주주의를 모르는데, 어떻게 민주공화국의 통치자가 됩니까.”
윤장관의 인터뷰에서 이교수의 말이 어떻게 기초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기업가 마인드는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 반면 정치학을 배우고 공무원의 직업을 가졌던 윤장관은 민주주의가 결과적으로 효율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시 이교수의 기고문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이제 결론부분에 가까와진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지 않나? 앞 세대의 성취와 피땀을 그렇게 부정하고 폄하하고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나? 제발 당신의 고결한 조부모와 부모들을 더 이상 능멸하지 말라.(중략) 나는 당신들의 그 빈정거림과 무지에 화가 난다. 그러니 나보다 더 고생하고 생존자체를 위해 발버둥쳐야만 했던 나의 앞 세대, 내 부모님 세대는 오죽하겠나?”
이교수는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의 어른들을 부정하고 폄하하고 심지어 할아버지,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고결함까지 능멸한 것으로 단정한다. 자신의 화가 이정도인데 이교수의 앞 세대의 화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의 고통에 대하여는 “유약하고 철이 없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고 글을 잇는다. 한편으로 이교수의 부러움은 젊은이들이 이룬 것이 아닌 앞 세대가 만든 것을 누리는 젊은이들이다.
“당신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들, 스타벅스 커피, 스타크래프트 게임, 해외 배낭여행, 그 어떤 것들도 당신들이 이룬 것은 없다. 당신들은 지금 이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것으로 지금 누리는 것에 보답해야 한다. 우리세대는 누리지 못했기에 당신들이 누리는 것을 보는 것으로 행복할 따름이고 부러울 따름이다.”
스타벅스의 대항마를 만들고 스타크래프트 게임과 경쟁하는 리니즈 등의 게임은 누가 만들었으며 배낭여행을 부모님 돈으로 가는 친구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에 나도 부모로서 조금 보태준 기억은 난다. 그리고 나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도 싶다. 그것도 머리끝까지 화를 낼 일은 없었다. 네버, 네버다.
이교수는 이어 결론을 짓는다.
“당신들의 앞 세대는 그저 물려받은 것 보다 몇 십 몇 백배로 일구어 넘겨준 죄 뿐이고 당신들에게 인생은 원래 고달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려주지 못한 것뿐이다. 사기꾼들이 이 나라 밖에는 어디 천국이 있는 것처럼 거짓을 전파할 때 설마 저런 소리에 속을까하며 미리 막지 못한 죄 뿐이다. 당신들의 부모들이 침묵하는 것은 어이가 없거나, 말해도 못 알아듣거나, 남보다 더 해주고 싶다는 한없는 자식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지 당신들의 응석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속으로 울화통이 터져서 울고 계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 한다”
윤장관이 말한 것 중에서 이교수의 결론부분과 비교할 부분을 찾을 수 있을까 살펴보다가 이 부분을 찾았다.
우리 나이로 올해 팔순이 된 윤 전 장관에게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싶은 얘기도 물었다. 그의 혜안에서 나온 조언과 당부를 듣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윤 전 장관은 이번엔 “할 말은커녕 사과부터 해야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나라를 물려줘서…”라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내 예상을 벗어난 대답뿐이었다. 그래서 질문보다 생각이 많았던 인터뷰였다.
인터뷰이를 검색하니 김지은기자다. 나이가 많지는 않아보였다. 인터뷰이도 질문보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그녀가 자기의 직분을 잊을 정도라고 감상을 전한 것은 예의였을까? 이교수의 글을 읽고 인터뷰이처럼, 김지은 기자처럼 젊은이들이 많은 생각을 하였을까 궁금해진다.
윤장관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대한 윤장관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교수의 글에 대한 감상을 대신한다.
-왜 올해 서울을 떠나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생의) 마지막 시기를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되잖아요. 돌이켜보니 근 10년 동안 끊임없이 떠들며 살았더라고요. 물론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 같은 사람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또 민주시민으로서 (사회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랬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는 것에 비해 너무 떠들어서 참 부끄러운 일이다 싶더라고요. 발산의 세월을 10년 보냈으니 이제는 입을 닫고 성찰과 수렴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최근에 아주 특별한 친분이 있는 작가가 거절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탁을 해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것 때문에 (결심이) 좀 깨지긴 했지만요.”
21년 후 젊은 누군가가 이교수에게 요청해서 그가 쓴 글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어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직원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가르치는 기업인이 아닌 어른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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