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하게 종교로 도망가느냐?
해가 어스름이 지는 저녁녘이었습니다. 동네 뒤 아파트 단지에 물건을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이미 자연부락 형태로 고립되어 마을을 제척하고는 아파트로 둘러싸였습니다. 뒷좌석에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큰 아이가 재잘거리며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고 나는 아이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 조심조심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복 4차선의 도로에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길옆으로 주차차량들이 즐비했습니다. 이제 막 봉고차 한 대가 주차를 하고는 운전석에서 젊은 남자가 내려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무단 횡단을 한 남자는 중앙선쯤을 건너고 있었고, 그 남자가 향하는 맞은 편 자전거포에서는 나이 드신 주인이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의 주차차량 바로 앞에는 횡단보도를 반쯤 물고 다른 봉고차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저 남자가 갑자기 뒤로 돌아 왔던 길을 돌아서면 주차차량과 중앙선 사이의 좁은 곳에서 사고가 날 우려가 있으니 천천히 서행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남자는 돌아섰고 그 남자의 봉고와 그 앞에 주차된 봉고차 사이에서 나풀하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듯 했습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고 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데 주위의 사람들이 차를 후진하라고 급히 막아섰습니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였고 차를 후진하는 저의 발과 손이 떨렸습니다. 큰 아이는 뒷좌석에서 급정지의 충격으로 앞으로 미끄러지면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아들이었습니다. 아직 초등학교 입학을 하지 않은 쾌활한 아이의 발을 바퀴로 밟는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급히 내 차로 아이와 아버지를 태우고 병원으로 이동하고 아이의 상태를 살핀 후 수술을 하고 입원을 시켰습니다. 아이의 복사뼈가 골절이 되었고 바퀴 사이에서 미끄러져 상처에 이물질이 묻었다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모두 깨끗이 씻고 수술도 잘 되었지만 복사뼈 근처에 뼈의 생장점이 있으니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나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나는 세상일은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고 확신을 했습니다. 규정 속도를 지키고, 교통신호를 지키고, 지정된 곳에만 주차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야만 교통사고를 내지 않고, 과태료를 내지 않게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계획을 잘 세우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input과 output의 상관관계를 항상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고 행동을 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규정 속도를 지켰고, 무단 횡단을 하는 사람을 주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쫓아 주차된 차량 사이에서 다섯 살의 아이가 뛰어 나오는 것을 미처 사전에 확인을 못했습니다. 나의 잘못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먼저는 횡단보도를 점거해 주차한 앞 차량의 잘못이 보였습니다. 만약 그 차가 횡단보도를 열어놓고 주차를 했다면 아이를 키우는 젊은 아빠는 무단 횡단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아이가 자기를 따라 무단 횡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고 무작정 길을 건넌 아이 아버지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세상에는 내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에 사고 신고를 하고, 피해가족들과 합의를 했습니다. 사고가 나면 피해자는 가해자를 가해자는 피해자를 믿지 못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피해자는 이 사고를 횡단보도 사고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저는 횡단보도 사고가 아니라는 주장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의 치료와는 동떨어진 서로의 주장이 의미 없음을 아이 아버지와 내가 확인하고 합의를 하고 사건을 종결지었습니다. 사고 후유증은 보험회사가 책임진다는 것을 의사로부터 확인하고, 가족들이 병간호하면서 발생하는 비용을 제가 보상하는 선에서 합의에 동의했습니다. 사고를 정리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절이 보였습니다. 어둑한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혼자서 부처님께 절을 하였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는데 나의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인풋이니 아웃풋이니 계획이니 결과니 하며 아는 척을 하던 나의 몸피가 크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그날 나의 몸은 종잇장처럼 가벼워 법당의 마룻바닥에 바짝 붙은 듯 했습니다. 평소라면 아내가 절을 하면 나는 경내를 돌아다니며 구경만 하던 모습이었을 것이었는데 그날 저녁 혼자서 어둑한 법당에서 절을 하는 내 모습을 연출한 것은 누구의 힘이었을까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 뒤로 스님들의 말씀을 따로 찾아 읽고, 듣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렵다고 교회를 찾아가나 비겁하게....’라는 소제목의 글을 읽던 중 “비겁해서가 아니라 편견에 갇혀있던 자신의 고집이 충격적 경험을 통해 깨졌기 때문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을 듣고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준비된 선물. 김민정 지음. 생명의 말씀사 출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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