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종이란?
내가 성경을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였다. 1979년이다. 폐렴에 걸려 부산 범일동에 있던 춘해병원에 입원을 하고 병실에서 만난 간호실습생의 추천 때문이었다. 함께 간 간증회에서 무례했던 나로 인해 인연은 끊어졌지만 그분이 추천하고 골라주었던 성경은 읽었다. A4용지 크기의 국배판이지만, 종이두께는 얇았다. 성경이란 것이 읽기는 부담스러웠지만 꼬박 며칠이 걸려 다 읽었다. 기억나는 것은 구약의 하나님이 잔인한 분이고, 신약의 요한 계시록에서 구원받는 분들의 숫자가 나온 것으로 보아 선민사상에 젖은 민족종교 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 성경을 찾고 싶었지만 유실되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고 싶었던 어린 아이에게 성경은 그저 활자로만 된 책일 뿐이었다. 그 속에서 무엇을 건져낼 만한 능력이 없었다. 책을 추천한 분에 대한 미안함이 성경을 일독하는 지구력을 자극했다. 이후 성경을 일독했다는 것은 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다시 성경을 일독하면서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던 단어가 '종'이었다. 주의 '종'말이다.
종이라는 것은 노예를 말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많은 단어가 있을 것임에도 하나님의 훌륭한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이라고 자칭, 타칭 마음대로 불러대는 것이 이해부득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그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단지 선악과라고 불리는 과일만큼은 먹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 외 모든 것은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받았다. 어느 종이 그런 재량권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종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었다. 회사로 말하면 고위 경영진 급이지 않은가.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시고, 불로 심판하신 것도 인간의 불경건함을 벌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기비하를 하니, 하나님도 인간을 쉽게 벌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수가 없다는 법언도 있듯이 인간이 종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쓰임을 중히 받는다는 것을 주장할 필요성까지도 느꼈다. 나이가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이치 중 하나가 궁하면 통한다는 것이다. 늘 '종'이라는 말에 의문을 가지고 불편한 마음을 가졌더니 읽던 책에서
솔깃한 내용이 나왔다.
“하나님의 종인 인간과 주인이신 하나님이란 말에서 '종'은 인간세상의 종과는 다릅니다. 명령을 받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에게 반응하고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빚으심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의 손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주님은 그의 도구를 원하는 대로 쓰실 수 있습니다. 종은 자기 혼자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기록될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이상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헨리 블랙가비/클로드킹.요단)
하나님과 나는 사랑하는 관계이고, 하나님은 나의 자유의사를 물어 주님이 쓰실 도구로 나를 빚는 것에 동의할 것인지를 확인 하시고는 나의 동의를 얻은 후에야 비로소 그의 도구가 되어 쓰이는 것이다. 내가 나의 계획과 실천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없어서이니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 무한한 하나님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하신다니 종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참으로 명실불부합이다. 나의 좁은 마음과 미련한 머리와 찬 가슴에서 종 대신 나오는 말이 있으니 '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는 없는 살림을 꾸리시느라 지치고 힘들었지만 내가 필요한 것은 선뜻 지갑을 꺼내어 아낌없이 주셨다. “돈이 생기면 쓸 일이 있구나”라고 하시면서 뿌듯해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잘 섬기지를 못한 것 같다. 그런 아버지가 나에게 “내 똥강아지”라고 부르면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가 마구 핧을 것 같은 그리움을 갖고 있지만 그때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었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사랑의 관계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다른 쓰임이 있어 나온 말이다.
나의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제는 예하고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종아 이리로 와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면 이제는 “예”하고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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