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정리한다
제1장 호색한과 여성혐오
일본 작가 요시유키 준노스케와 나가이 가후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며 여자를 알려고 하지만 소설에서는 여자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였으면 하는가, 에 관한 남성의 성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과 같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오리엔트를 지배, 재구성,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양식’, 즉 동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서양의 지식으로 정의한 것과 같다(21쪽)
이들의 책을 남성의 성환상에 관한 훌륭한 텍스트로 읽으면 적나라하게 남자의 속내를 드러내 주는 교훈적인 독서도 없다. 미즈타 노리코의 ‘여자에게로의 도주와 여자로부터의 도주’(1993)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남성 작가들은 여성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여 자기 멋대로 해석해왔는데, 그들이 그려온 꿈 속 여성과 현실 속 여성과의 괴리야말로 남성 내면의 풍경을 현란 시켜온 주범이다.’(25쪽)
남성의 성환상에 빠져 그 속에서 ‘꿈 속의 여성’을 연기해주려 한 여자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이 현실 속 여성으로부터 ‘도주’하여 가상 현실 속 ‘여자’에게 빠져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28쪽)
제2장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여성혐오
호모섹슈얼은 남성 간 성애를, 호모소셜은 성적이지 않은 남성 간 유대를 칭하는 말이다. 이를 구분한 사람이 세지윅(Eve Sedgwick)이다. 호모소셜을 ‘남성 간 유대’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세지윅은 호모소셜 속에는 호모섹슈얼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두 가지는 연속체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간의 유대는 성적 주체 간의 연대를 말하며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이 가진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가 필수불가결하다.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이다.(36쪽)
여성의 성적 객체화를 서로 승인함으로써 성적 주체 간 상호 승인과 연대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가 여성의 위치에서 벌이는 섹스(호모섹스)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호모포비아는 호모소셜을 유지하는 수단인 것이다. 차별의 정의는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이다.’ 이를 수정하면 성차별이 된다. ‘성차별이란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남성들이 동일화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남성됨을 인정해주는 것은 이성인 여성이 아니다. 동성인 남성이다.(43쪽)
제3장 성의 이중 기준과 여성의 분단 지배-‘성녀’와 ‘창녀’의 타자화
타자화란 상대방을 이해 불가능한 존재-즉, 이방인, 이물질, 이교도-로 만들어 ‘우리들’로부터 추방하는 양식을 말한다. 타자화 양식은 인종화와 젠더화 두 가지가 있다.(47쪽)
인종이란 백인종들이 ‘백인이 아닌 이’를 배제함으로써 ‘백인됨’을 정의하기 위한 장치(예를 들어 후지카와 다카오 편저의 (백인이란 무엇인가?)(2005))이고, 젠더가 ‘남성이 아닌 이’, 즉 남성이 되지 못한 남자와 여자를 배제함으로써 유지되는 경계이며 남자가 남성으로서 주체화되는 장치이다. 인종은 계급과도 연결되어 있다.(49쪽)
‘남자가 남성으로서의 성적 주체화를 달성하기 위해, 여성 멸시를 아이덴티티의 핵심 깊은 곳에 위치시키고 있으며, 그것이 여성혐오다’라고 논했다. 호모포비아 역시 여성과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공포로 이해가 가능하다. 남성은 자신이 ‘여자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 혐오에도 아킬레스근이 있다. 바로 어머니이다. 사실 여성 혐오는 여성 멸시 뿐 아니라 여성 숭배라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이 둘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성의 이준 기준이라는 개념이다.(51쪽)
성의 이중 기준은 여성을 두 종류의 집단으로 분할하게 된다. 성녀와 창녀의 구분이다. 실제 살아 있는 여성에게는 몸도 마음도 그리고 자궁도 보지도 달려 있지만, ‘생식용 여성’은 쾌락을 빼앗긴 채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쾌락용 여성’은 쾌락에 특화되어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소외론이 여기서도 나온다.)(53쪽) 분단지배는 여성을 숭배와 멸시의 계급으로 두 계급을 분할하여 통치하는 지배의 원리이다.
제4장 비인기남과 여성혐오
성적 비대칭성의 설명 : 성적 약자는 연애 시장의 규제 완화, 성의 시장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자원의 독점 현상과 더불어 성적 강자와 성적 약자가 태어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남자에게 국한된다. 여성 중에도 남성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성적 약자가 있을 텐데, 여자들은 ‘성 시장’의 플레이어로서 등장조차 않는다. 성 시장에 등장하는 플레이어에는 분명한 젠더 비대칭성이 있는 것이다.(65쪽)
‘사회적 약자’라고 하는 어휘는-나는 그것이 단순한 오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여성 혐오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담론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82쪽)
사회적 약자는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는 규칙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의 대상은 남성만이다. 그들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키울 생각보다는 과거의 전원 결혼 시대처럼 누구나 원하면 결혼을 하는 시대의 여성을 갈망할 뿐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어 여성은 서로가 소통하고 소외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를 여성만의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적 약자인 남성이 이를 거부한다면 그는 이미 퇴행적인 남자로서 영원히 연애와 결혼의 사회적 약자일 뿐이다.(내가 정리한 내용임)
제5장 아동 성학대자와 여성혐오
페미니즘이 바꾼 용어들
1. 성적 장난 ⇨ 성추행 2.사랑 싸움 ⇨ 가정 폭력 3. 소년애 ⇨ 아동 성학대(87쪽)
‘소년애’나 ‘성애’ 같이 오해를 부르는 용어 사용은 가급적 피하기로 하자. 성은 욕망의 언어이고 사랑은 관계의 언어이다.(88쪽)
성욕(개인의 내부에서 완결되는 대뇌 작용의 현상, 성적 욕망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섹슈얼리티는 다리 사이가 아니라 귀 사이, 즉 대뇌 안에 있다.)과 성행위(욕망이 행동화한 것으로 그 행동에는 타자(신체)를 필요로 하는 것(성관계)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마스터베이션)이 있다) 그리고 성관계(타자의 개입을 수반하는 것으로 사회관계의 하나가 되며 따라서 ‘공적’인 것이 된다. 공적인 섹스에는 사회관계에 적용되는 모든 시민 사회의 룰이 적용된다.) 가 있다. 성욕 속에는 성‘관계’욕이라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타자가 등장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완결적인 욕망이 아니게 된다. (91쪽)
파멜라 슐츠의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Not Monsters)(2005) : 아동 성학대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동의를 구하지 않고(혹은 구하지 않아도 되는) 무력한 타자의 신체를 이용하고, 집착하고, 의존하고, 지속적으로 제압하려 하고, 아이로부터 자존감, 타인에 대한 신뢰, 자기통제감 등을 무참하게 빼앗아간다. 또한 아이가 그것을 바라고 있다고 믿고자 하며 유혹한 것은 아이였다고 몰아간다. 가해자의 99퍼센트가 남성이며 피해자의 약 90퍼센트가 여아, 10퍼센트가 남아이다. 슐츠는 이들 남성 대부분이 자기평가가 낮으며 스스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라는 사실을 발견한다.(99쪽) 이러한 관계는 강간이나 성추행, 가정 폭력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성애 남녀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100쪽)
여기서 우리들은 다시 이브 세지윅으로 돌아온다. 세지윅은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라 했다. 호모소셜한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 즉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남자를 남성으로서 인정하는 것은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다.남자는 여자를 소유(자기 것으로)함으로써 남성이 된다. 이 관계는 비대칭적인 것이며 연접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미셸 푸코는 호모포비아의 원인을 ‘삽입하는 이’와 ‘삽입 당하는 이’ 사이의 성행위의 비대칭성에서 찾았다. 페니스의 유무라는 즉물적 비대칭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능동과 수동의 관계, 즉 성적 주체가 되는가 성적 객체가 되는가 하는 비대칭성 속에서 여성의 위치를 점하는 것에 대한 낙인(남성 입장에서)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여성화’라고 부른다.
남성이 여성화되는 위험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동성애 행위를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소년애’이다. 소년은 항상 연장자의 욕망의 객체가 되며, 반대로 소년이 연장자에게 정을 품어 연장자가 욕망의 객체로 전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소년애의 이상은 소년들은 쾌락이 아니라 존경과 애정에서 연장자에게 스스로의 신체를 자발적으로 바쳤다는 것이 된다. 푸코가 소개하는 고대 그리스의 소년애 이상이 아동 성학대자의 판타지와 대단히 닮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 이가 있을 것이다. 아동 성학대자의 많은 수가 소심하면서 취약한 ‘남성됨’ 아이덴티티의 소유자라는 사실의 이유가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그들은 아동 성학대를 통해 여성 혐오와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같은 사실에 대한 동전의 양면이다-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106쪽)
페미니즘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적대시를 접하면서, 또 간혹 극단적인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놀라면서 읽게 된 책이다.
여성 혐오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의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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