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독서정리노트:하나님의 열심-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야곱

무주이장 2018. 5. 16. 11:05

하나님의 열심.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박영선 지음. 무근검 출판

- 무근검은 남포교회출판부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무근검은 ‘하나님의 영광은 무겁고 오래된 칼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서문 중(7쪽)

‘성경 속 인물들을 더 이상 위인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들처럼 살아보겠다는 열정도 희미해진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전제로 출발하여 따져 물어도 하나님의 열심은 오늘도 한결같이 모두에게 충만히 다가올 것입니다.’

‘불변하고 여일한 이 열심 앞에 기꺼이 항복하는 복된 신자가 되기 바랍니다.’


야곱(JACOB)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야곱이라는 이름을 직역하면 ‘발뒤꿈치를 잡다’는 뜻으로, 의역하면 ‘약탈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강도요 도둑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자리를 뺏는 야비함을 보임에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말은

‘인간이 가진 조건’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조건은 하나님에게 선택의 기준이나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커드라인을 우리가 통과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라는 뜻입니다.’(147쪽)

‘택하심’이라는 말은 교리에서는 ‘예정’ 또는 ‘선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148쪽)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로마서 9:7-13)

(이삭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였다는 말로 이삭이 하나님의 것이었다는 뜻인가?)

택함을 받은 야곱이 ‘그렇다고 로봇처럼 하나님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자유의지를 지닌 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151쪽)


(이삭은 야곱을 낳고)

이삭은 에서를 먼저 낳았음에도 기록에는 ‘야곱을 낳고’라는 것은 이삭이 장자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야곡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섣불리 야곱은 영적갈망(장자가 되겠다)이 있었기에 택함을 받았다라고 결론 지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은 이미 택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장자(예수 그리스도)의 명분을 갈망하도록 인도 받았다고 하는 편이 옳은 것입니다.’(155쪽)

‘반면, 에서는 장자(예수 그리스도)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에서는 이후 저주의 상징이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저주할까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이토록 큰 죄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이라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아서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이전의 인간이라고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중간에 마음을

바꿔서 모든 인간을 구속하여 주신 걸까요?)

‘하나님에 대한 에서(에돔)의 태도가 교만입니다.(말라기 1:2-5)

교만은 흔히 생각하듯 잘난 체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족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없다. 나는 나 홀로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성경의 용어해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용어해석은 정의되어 있나요? 아니면 고무줄처럼 마음대로 늘이고,

이어령비어령은 아닌가요? 궁금합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이방신을 믿는 자였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은 선택하시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죄로

이토록 저주하시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우리 신자들 중 에돔과 같은 자는 좌절해야만 할까요? 하갈이 나은 이스마엘은

이슬람이라는 이방신의 우두머리를 세웁니다. 그는 어떻게 되나요?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저주 받은 걸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럼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돔은 이후 저주의 시기만 오면 호출된다고 합니다. 에돔은 계속 경건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

그럴까요? 아니면 낙인 찍힌 자로서 회개의 여지도 없었던가요? 하나님의 열심은 이 경우 어디에 있나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는 없나요? 역지사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동족의 가슴에 칼을 꽂고 부부가 생이별 당하며 아이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는 현실의 부조리를 만드는 종교라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 계신가요? 거짓 선지자들 때문이었던가요? 에서의 교만을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에돔이라는 이름으로 저주받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이 미울 뿐입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신다고 하니까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고)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선함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불법을 먼저 사해주셔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도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164쪽)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곧잘 잊어버려서 구원 얻은 후에 저지른 잘못만 크게 생각합니다. 구원 얻은 이후에

저지른 잘못은 구원 얻기 전과 견주어보면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데도 말입니다.’(165쪽)

‘우리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우리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 것입니다.--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신앙에서 제일 몹쓸 병이 좌절입니다.--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그러니)우리는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하나님이 포기하시지 않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담대함으로 더욱 든든히 서 가기 바랍니다.’(167쪽)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벧엘사건입니다)

벧엘 : 하나님의 집, 베다니 : 가난한 사람의 집, 이스라엘 :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의 뜻

벧엘사건(창세기 28:10-15)에서 눈여겨 볼 것 두 가지.

①야곱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다리를 걸고는 친히 야곱을 찾아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②꿈은 꾸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꿈을 꾸는 자가 마음대로 꿈을 정해서 꾸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사람이라서,

원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원대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남 달라서, 원대한 비전을 품고 사니까

이런 꿈을 꾸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170-171쪽)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돌아오게 할 것이면서 왜 야곱은 힘든 여정을 겪게 하셨을까요? 창세기 47:9입니다.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라고 한 고백이 그의 인생을 압축하여

말해 줍니다.(174쪽)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어는 쪽 인생살이가 더 편할까요? 백이면 백, 안 믿는 사람들이 더 편하게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놓아두지 않고(그래서 힘듭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175쪽)

‘야곱처럼 힘든 나그네의 삶을 거쳐 와야 비로소 우리는 이 썩어질 육체의 소욕을 내려놓고 영원을 준비하게 됩니다.--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애쓰고 추구한 일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죽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그는 지옥에서야

저 멀리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그러고 보면 지옥과 천국이 서로 말을 할 수 있는 ‘멀리’로 바로 옆인 것 같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하나님은 야곱이 하란에 도피하러 갔다 올 것 없이 바로 그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가나안 땅을 얻는 그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 땅을 소유할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란에서의 삶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정열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높습니다. 사랑이란 능력이고 수준입니다.--사랑은

굴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182쪽)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야곱을 불러 그를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을 보며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걷고 있는 믿음의 여정이 지금 막

하란을 향해 떠난 야곱의 여정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벧엘은 야곱의 인생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는 벧엘에서 시작하여

하란까지 이십 년 동안 내내 고생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얍복 나루 사건‘까지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을 빚어가셔서

그가 말년에 담대한 믿음의 자리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며 용기를 얻습니다.’(187쪽)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하다가)(얍복 나루 사건)

어떤 사람(하나님의 사자)이 야곱에게 요구할 것이 있어 씨름을 걸었으나 여의치 않아(야곱이 버티며 항복하지 않기에) 떠나려고 하지만

야곱은 그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이렇게 하나님이 몸소 찾아오셨는데도 인간은 쉽게 항복하지 않더라는 이야기가 바로 얍복 나루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칩니다. “내가 떠나면 너는 끝이다”라는 최후 경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비로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그는 “야곱이니이다”라고 답합니다. 지금 야곱은

“나는 약탈자입니다, 강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이미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깨달은 야곱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한껏 낮춘 채 이 고백을 꺼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는 복이 내려집니다.’(202쪽)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인생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조만가 우리는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이 걸어 오시는

씨름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하나님을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양보하시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비가 있습니다.’(204-205쪽)

‘하나님은 우리가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항복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이 걸었던 것 같은 긴 여정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205쪽)

‘유려한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자신이 고백한 수준에 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항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야곱이 그런 존재이며 우리 역시 그런 존재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존재라는 것이 보입니다.)


(지독한 열심, 맹렬한 사랑)

‘얍복 나루 사건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을 찾아와 씨름하시고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리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십시오. 그것은 분노나 포기가 아닙니다. 심판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사랑때문입니다.’(209쪽)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창세기 49장에는 죽음을 앞둔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놓고 그들이 장차 겪을 일들을 일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복을 빌어주는

말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 야곱은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 같아 보입니다.’(213, 215쪽)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자칫 염치없는 자기 과시로 비칠 수 있는 야곱의 말을 살펴보면, 복을 베푸는 주체는 늘 ‘야곱의 전능자’나 ‘네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나 야곱’이 주체가 된 적이 없습니다. 야곱은 일을 이루는 주체를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말은 ‘내가 내 선조보다 더 잘났다’고 하는 자랑이 담긴 표현이 아닙니다.


(벧엘에 올라가 거기 거주하고)

‘창세기 34장에서 강간당하는 디나 사건이 일어납니다.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그러나 야곱은 세겜에 거하며 제단을 그곳에 세웠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3:17-20, 창세기 28:20-22)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야곱의 생애를 대하면서 드는 생각은 ‘야곱은 정말 지독하게도 하나님 말씀을 안 들었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야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존재인가 깨닫게 됩니다.’(223쪽)

‘우상이란--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온전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것이면 전부 우상입니다.’(226쪽)


(야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창세기 49장의 고백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다.” 이는 야곱이 바르게 잘 살았기 때문에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렸기 때문에

나온 고백도 아닙니다. 역경과 고통의 시간을 거치며 이르게 된 고백입니다.’(227쪽)


1.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현실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꾸미신 이유는 진정한 믿음을

깨우쳐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2. 야곱은 하나님을 보조자로 사용하려 했고, 위기 시에 자신을 보호해 줄 보호자로 처음 인식했으나 나중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외치고, 자신의 하나님이 아들들을 축복하리라고 고백합니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3. 그러나 야곱에 대한 선택과 대비되어 비록 장자의 지위를 가볍게 생각한 죄가 있고, 교만했던 에서(에돔)에 대한 선택을

포기하시고 줄기차게 저주 하시는 모습에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있어 이를 이해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4. 좌절하는 신자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에돔의 교만을 갖지 않게 하시고 혹 가진다 하더라도 속히 깨달아

회개할 수 있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