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열심.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박영선 지음. 무근검 출판
- 무근검은 남포교회출판부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무근검은 ‘하나님의 영광은 무겁고 오래된 칼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서문 중(7쪽)
‘성경 속 인물들을 더 이상 위인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들처럼 살아보겠다는 열정도 희미해진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전제로 출발하여 따져 물어도 하나님의 열심은 오늘도 한결같이 모두에게 충만히 다가올 것입니다.’
‘불변하고 여일한 이 열심 앞에 기꺼이 항복하는 복된 신자가 되기 바랍니다.’
아브라함(ABRAHAM)
‘믿음이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서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라고 선언해 놓고 이 메시지가 오해되지 않게 하려고
이어지는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해석하여 덧붙입니다.’(13쪽)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상황에서 만나서 지시한 땅으로 떠날 때, 사도행전7:2-4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명령을 받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아버지
데라(여호수와 24:1-3)와 상의하고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최소한의 종교심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하란까지 내몰린 것(창세기11:26-32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에 불과합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구원의 원인을 우리에게서 찾으려 한다면 일단 구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29쪽)
‘믿음에 대해서도’ ‘인과율에만 근거한 인간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불신앙입니다’(29쪽)
‘나는 믿는다’라는 고백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으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30쪽)
데라가 죽은 후(창세기 11:26-32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은 다시 등 떠밀려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창세기12:1-5)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하란과 가나안으로 간 게 아닙니다. 믿음이 없었던 아브라함을
계속 하나님은 ‘밀어내어 가나안까지 이르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스스로 항복한 적도 구원에 합의한 적도 없습니다.--우리는 하나님과 합의하거나 하나님에게 동조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믿음의 여정을 출발하게 하시는 일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36쪽)
(믿음으로 아브라함으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신에게 주입하여 세뇌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억지
부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시는 작업, 곧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9)
‘하나님은 맨 먼저 우리의 운명부터 설득하시고 다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이해를 설득하십니다.’(38쪽)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신앙의 타락’이냐 ‘아브라함은 본래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관점이냐?
(부재와 침묵의 메시지)
‘아브라함이 팔십육 세에 이스마엘을 얻자, 이후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오랜 시간 그에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장장 십삼 년이라는 세월을 하나님이 침묵해 버리신 것입니다.’(47쪽)
‘이 십삼 년간의 침묵이 하나님의 꾸중이라는 결정적 단서가 창세기 17장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가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꾸짖음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인데, 너는 왜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라는 질책인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상속자를 얻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이렇게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48쪽)
(하나님이 편들어 주시는 아브라함)
조카 롯을 구하려는 만용의 근거는?
(믿음, 하나님의 설득하심)
‘믿음은 우리를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도록 은혜로운 사랑의 열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53쪽)
‘믿음은 인격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내놓은 결단이나 의지를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54쪽)
사라를 되찾게 하시고 바로를 혼내시는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보다. 그런데 이 대단한 하나님이 나를 편들어 주시다니’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애굽에서 경험합니다. 이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은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러 가게 됩니다.’
또한 롯과 헤어지길 결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백성)
하나님은 ‘맡기신 것 없이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여 이 지점에서 자주 넘어집니다.(58쪽)
(한 걸음 또 한 걸음)
‘성숙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넘치는 의욕으로 자신의 완벽한
신앙을 다른 이에게 척 드러내 보이기 전에 하나님에게 설득되어 믿음이 한 단계 한 단계 자라는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61쪽)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설득과 간섭이 우리의 신앙여정에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삭을 고대하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삭을 바치는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64쪽)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구원이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지 않았습니다.’(69쪽)
‘이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믿음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결단하고 의지를 발휘하면 그냥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열심히 설득하셔서 아브라함 안에 자라나게 하신 것,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정체, 그것이 아브라함이
내보인 믿음입니다. 성경이 믿음에 대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72쪽)
(구원, 보수가 아닌 은혜)
‘보수와 은혜를 대조하여(로마서4:1-8) 구원을 은혜라고 설명했듯, 행위의 법과 믿음의 법을 대조하여(로마서3:27-28) 구원을
믿음의 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얻는 구원이 아니기에 사람이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량할 것이 없다고 강조합니다.’(75쪽)
‘‘나는 구원을 은혜로 여기는가, 아니면 보수로 여기는가.’ ‘구원을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믿었음을 내세우고
싶은가.’ 이 두 질문으로 자신을 돌아보면 구원을 성경대로 이해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75쪽)
(구원, 하나님의 전적인 일하심)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하나님에게서 시작한 것입니다.’(78쪽)
‘이방신 말고는 아는 게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설득이 마침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이 자라,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설득하셔서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79쪽)
(인과율을 넘지 못하는 인간)
‘믿고 결단하고 울며 회개하는 이의 경험이 구원의 조건이나 원인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구원의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며
구원을 받았기에 생겨난 변화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울면서 회개한 것은 거듭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거듭났기 때문입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이미 거듭나고 구원 얻은 자만이 죄를 깨달아 회개할 수 있습니다.’(82쪽)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는 믿음)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설득과 인도로 이 믿음의 자리에 다다랐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90쪽)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창세기17:5 ---되게 함이니라. ‘약속의 이루는 주체와 그 주체가 지닌 열심과 의지가 이 문구 속에 강조되어 있습니다.’(97쪽)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인간의 잘못(아브라함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신실함(나는 네게 복을 줄것이다)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기묘한 이름인 셈입니다.‘(98쪽)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죄를 지어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는 자리에 오면 질책을 받겠지만, 이 질책을 받는 일이 사실 우리에게
복입니다.--신앙의 여정에서 벌어지는 신비는 이처럼 헤아릴 수 없습니다.’(100쪽)
(홀로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
‘하나님 홀로 제물사이로 지나가심(창세기15:17)으로써 이 약속은 하나님이 홀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레는 거룩함을 의미(레위기 19:23-25)하는 표시라고 했는데, 신약에서 할례는 구원을 가리키는 말(골로새서 2:8-15)로
사용되어 있습니다.’(108쪽)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직역하면 ‘잘라 버린다’ ‘끊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원래 우리가 끊어져야(죽어야) 하는데, 우리는 다만
포피의 일부만 끊어 내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실 것, 곧 구원하실 것을 지금 아브라함에게 상징으로 보여주며
구원을 약속하는 것입니다.’(창세기 10-14)
‘할례는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 내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은 사실 생식기의 일부가 아니라 생식기 자체를 잘라 내는 행위를
상징하므로, 할례를 받은 자는 ’종족을 보존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갖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할례는 언약 백성이
육체적 방식으로 이어지는 종족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생겨난 특별한 종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됩니다.--아브라함은
할례의 경험을 거쳐 이제 독자 이삭까지 바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110쪽)
(번복하지 않는 부르심)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 할례를 명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보십시오.--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로마서 8장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로마서 8:31-35, 38-39)
(네 씨로 말미암아)
‘네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아 모든 민족에게서 신자들이 생겨날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창세기 22:15-18)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라디아서 3:16) 이는 결국은 ‘네 씨 곧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것입니다.(120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복을 약속하신 사건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과 함께 읽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121쪽)
(없는 자, 이삭)
‘할례는 생식능력을 끊어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삭은 없는 것이다.
네가 낳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돌려달라고 하시지 못할 것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이삭은 부모가 낳지 않은 존재, 인간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존재, 원래 없는 존재를 상징합니다.’(124쪽)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은 육적 차원이 아닌 영적 차원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태어난
자입니다.’(124쪽) : 이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났듯 이삭이 사라에게서 얻은 것은 아브라함의 씨냐?
라는 물음이 생깁니다. (질문1:이삭은 백 살의 노인으로 이삭의 신체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그러나 로마서 4:17-19절에서는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를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없이는 죽은 자임을, 그리고
그의 자손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가 깨달았던 것입니다.(126쪽)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까? 아니면 정녕 육체를 주신 이도 하나님이니 아브라함과 사울이 만든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목사님은 ‘이삭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포함하여 자신들은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아브라함의 동의이자 항복인 것입니다.’
라고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바치러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질문2: 아니면 영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까?)
(모리아산에 드러난 십자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씨‘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입니다.’(132쪽)
모리아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이삭에게 손대지 말아라.--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이제야 알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숫양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제물을 취하셔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127쪽)
하나님의 예정 : ‘예정’은 하나님이 목적과 계획을 갖고 일하신다는 교리입니다.(132쪽)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은 백 세에 낳았건, 가장 아끼는 아들이건 간에 인간은 누구든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군말없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갔던 것입니다.’(134쪽)
질문3 : 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합니까? 원죄때문?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신자의 삶)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예수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상징하기도 합니다.’(134쪽)
‘출애굽 사건에 담긴 하나님 계획은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일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출애굽에 대해 아직 절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가나안까지 들어가야 출애굽이 완성됩니다.’(136쪽)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곧바로 젖과 꿀을 맛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우리가 가나안에서 해야 하는 것은 전쟁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 곧 성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37쪽)
(마침내 우리가 다다를 자리)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던 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열심히 이루어 낸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139쪽)
‘이삭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다만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누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누군가를 들어 일하셨다면, 당신의 일하심을 구체적 존재를 통해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삭이라는 구체적 존재로 증언되는 것입니다.’(141쪽)
읽고서 든 생각과 질문들
1. 박영선 목사님은 우리 신자들이 좌절을 느끼는 것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고마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그가 처음에는 불신앙인이었다가 하나님이 이끌어 최종적으로 자기의 독자인 이삭조차
내어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모두 처음에는 믿음이 없거나 약합니다. 하나님의 넓고도
완전한 능력을 믿어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욱 굳고 단단해질 수 있음을 믿는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자에게 고루 있다 하셨습니다.(비록 에서는 계속 하나님이 미워하시지만...그래서 나는 아직도
구약의 하나님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영생과 천국이 나의 것이 됨을 알아채야 합니다.
(영생과 천국이 아직 관심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2. 이삭의 존재는 애초 하나님의 것이었다는 표현은 영적인 상징입니까? 아니면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와 같은 이적입니까?
야곱의 나이 백 세에 어찌 아들을 얻을 것이며(이것이 남자의 경우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라의 나이 이미 태가 죽었는데도
이삭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주신 것입니까?(내 아들이니 내가 데려가겠다. 모리아산에서
나를 위해 바치라는 명령이 이로써 타당하다는 것 아닙니까?)
3. 하나님 앞에 모든 존재는 죽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구약은 모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경향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활동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으로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을 본받아 성화되는 것으로 구원을 구체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믿고,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5. 성경의 말씀을 이루는 개별적인 단어는 마치 법률용어처럼 일상의 단어와는 다른 뜻을 가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 단어의 개념이 법률의 그것처럼 확정된 뜻이냐, 아니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냐(그래서 성경해석의 다름으로
이단논쟁이 일어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6. 아브라함의 생은 창세기 15장의 칭의사건과 17장의 할례사건, 그리고 22장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으로 평범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아들이 되었는지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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