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간행 18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1956년부터 1962년 일곱 해를 살았던 시인 백석(백기행)을 작가 김연수는 소설로써 기억합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집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두리번거리며 당황하게 됩니다. 백석이 시를 쓴 마지막 기간이 1956년부터 1962년이었다고 합니다. 일곱 해의 마지막, 1962년에서 김연수의 이야기가 끝나는 이유입니다(백석은 1996년 사망했다고 합니다). 백석은 1912년 태어났고, 1996년 북한에서 죽은 시인입니다. 동족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전쟁통, 낙동강 전선까지 참전하여 인민군 종군기자로서 기사를 썼던 백석은 전쟁 후, 이념의 칼날이 사람을 난도질하는 북녘에서 시인으로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를 기억하며 작가 김연수는 ‘일곱 해의 마지막’을 기억..

매일 에세이 2024.04.09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소설. 문학동네 간행 4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라틴어로 된 학명을 줄줄 외우시는 보건소장님을 지켜본 아이의 추억담입니다. 어느 먼 아프리카의 오지에 있는 마을 같은 80번지 마을에 장티푸스가 퍼집니다. 하수도 시설도 없는 마을이라 조금 큰 도시라면 여기저기 한 곳 이상에는 있는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 ‘똥골’같이 위생상태가 좋지 못한 마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80번지 대장쥐가 장티푸스를 퍼뜨린 원흉이라며 쥐를 잡아 하수구 구정물이 모이는 개천에 버립니다. 복개천 아래로 찾아간 보건소장님은 장티푸스균을 퍼뜨려 쥐를 박멸하려던 계획이 틀어져 쥐는 장티푸스에 면역을 가졌다며 장티푸스를 옮기는 종은 이 세상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밖에 없다고 주민들에게 설명합니다. 신..

매일 에세이 2024.03.27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소설. 문학동네 간행 2

뉴욕제과점과 첫사랑 그리고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 가겟방이라는 말이 있던 시절입니다. 가게라도 얻으려면 집 보증금을 빼야 했습니다. 추가로, 덧붙여, 하나 더, 별도로 얻을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가게가 빵집이라도 되면 거기에서 책보 들고 나오는 아이는 보기 좋습니다. 술을 파는 가게에서 교복 입고 나오는 언니라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미장원에서 나오기 싫어 사주경계 후 나오는 남학생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뉴욕에는 절대로 없을 법한 ‘뉴욕제과점’이 김천 어디쯤 있다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김천역을 나와 광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좁은 마당을 나와 뉴욕제과점이 있던 자리의 국밥집을 찾아가는 작가의 발길이 어딘가 익숙합니다. 김천역을 지나간 경험이 있어 그랬던 모양입니다. 김천역 옆 ..

매일 에세이 2024.03.27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엘 제빈 장편소설. 엄일녀 옮김

제가 다녔던 대학은 버스를 내리면 정문까지 백 미터 남짓 거리가 됩니다. 정문까지 거리의 양 옆에는 서점이 4~5개 있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책을 사려고 들르곤 했습니다. 교양 수업을 하던 국어국문과 교수님이 교재를 판매하는 서점을 소개하면서 대학가에 서점이 자꾸 줄어든다며 대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걱정을 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서점 옆에는 찻집과 당구장 그리고 술집이 에워싸고 있었지요. 복사집도 기억이 납니다. 서점이 힘에 부쳐하던 시절이었지만 책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읽던 곳이 대학이었습니다. 교과서가 되었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든, 서점에서 고래 힘줄 같은 제 돈으로 샀던 책이든 늘 책을 곁에 두는 곳이 대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문을 기준으로 해서 대학 구내와 밖의 공기가 달랐던 기억이 납..

매일 에세이 2023.10.22

남자가 된다는 것(TO BE A MAN). 니콜 크라우스 소설. 민은영 옮김 2

두 번째 이야기는 유대인 남자 이야기입니다. ‘옥상의 주샤’라는 제목의 글인데 주샤는 랍비 이름입니다. 주샤가 우크라이나의 한노필(이디시어로 ‘아니폴리’)에 정착한 후 그의 주위로 정통파 유대인들이 모여 하시딤이라는 영적 부흥 운동과 이를 따르는 유대인 공동체가 생겼다는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옥상에서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를 만들 랍비 주샤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50년간 교수로서 살았던 주인공은 2주 동안 병원에서 죽어 있었는데 다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는 장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합병증으로 양측성 폐렴에 걸려 회복할 수 없으며 죽을 것이라는 의사들의 확정적인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던 그날들에 딸은 손자를 낳았습니다. 지옥의 문 ..

매일 에세이 2023.10.20

남자가 된다는 것(TO BE A MAN). 니콜 크라우스 소설. 민은영 옮김 1

이 책, 네 편의 소설을 읽고는 재빨리 책 뒤의 해설을 읽었습니다.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어렴풋이 알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원제를 그냥 우리말로 해석한 것입니다)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옮긴 이, 민은영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호하고 광범위하고 논쟁적일 수도 있는 제목으로 한데 묶인 이야기들에서 니콜 크라우스가 주로 주목한 것은 젠더 등의 문제도,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의 문제도 아니다. 그는 남성성을 정의하는 문화와 남성 개인의 삶 곳곳에 작용하는 폭력성에 주목하며 그것이 본인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비트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묘사한다. 그리하여 이 단편들은 결국 남자의, ..

매일 에세이 2023.10.20

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소설. 문학동네 간행

현실을 사는 힘은 어떤 종류일까요? 정치적 권력을 쥔 대통령이 귀 닫고 눈 감고 오직 입만 열어 “내가 왕이다” 큰소리칠 수 있는 힘이 현실을 사는 힘일까요? 아니면 그런 대통령과 그의 수하들에 대항하여 압수수색을 당하고 수사를 받아도 하고 싶고, 해야 할 말을 하는 힘이 현실을 살아내는 힘일까요? 그렇게 뉴스가 되는 힘만이 현실을 사는 힘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일상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 힘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김지연의 소설을 해설한 문학평론가 강지희는 현실을 사는 힘을 두 개의 농담이라고 풀었습니다. “자신의 진솔한 마음이 노출될 위기 앞에서, 때로는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빠르게 농담의 외피를 입는다.”라고 두 개의 농담 중 한 개를 설명합니다. “현실을 살면서 솔직하게 다 표현하지 못하고 ..

매일 에세이 2023.10.17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송지현 소설. 문학동네 간행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 남에게 보여주기도, 나조차도 보기 싫은 현실을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아빠를 좀비로 만들고, 동생과 엄마를 죽일 수 있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동기가 없는 살인은 소설을 끌고 갈 힘이 없습니다. 왜 죽였대? 하고 물으면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자를 무시한 소설은 법을 무시한 독재자 거나 야당을 무시한 여당이 거나, 국회를 무시한 행정부와 같이 얼마동안 존재하다 사라질 이야기입니다. 어떤 작가가 금방 사라질 이야기를 겁도 없이 하겠습니까? 사람은 일상의 평온함을 기대합니다. 일상이 위태롭다는 반증이지요. 사고 소식을 접하면 간혹 저곳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할 때가 있습니다...

매일 에세이 202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