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를 왜 배울까? 남자는 왜 희랍어를 배웠으며 여자는 왜 희랍어를 배우려고 할까? 희랍어는 문법적으로 복잡하며 철저하게 문법을 지키는 언어라고 하는데, 그래서 배우기도 어렵지만, 그걸 배워 어디에 쓸까 막막하기만 한 언어 같은데 왜? 굳이 소설의 제목을 ‘희랍어 시간’이라고 정한 것은 어떤 의도일까? 나름 소설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항상 벽에 부딪힌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한강 작가의 글은 잘 읽힙니다. 문단과 문단의 연결에 어떤 저항감도 들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에도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제 발로 따라나섭니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한 작가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절한 비유를 잘 섞어 글을 쉽게 이해되고 읽기가 편하기는 작가라고 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한결같이 아픈가? 불만 아닌 불만으로 불편합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며 글쓰기를 하였던 작가이기에 시대의 아픔을 우리에게 전달하며 인간성을 통찰하고, 세상을 보는 지혜를 전달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어린 나이에 독일로 이민을 갔고, 남의 나라 익숙하기에 힘든 문화를 견디며 그가 동급생들보다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과 희랍어였습니다. 수학이 규칙으로 이루어진 언어라면 희랍어는 문법적으로 복잡하고 규칙이 엄격한 문자라고 합니다. 이왕 독일로 간 것이면 거기에 적응하며 살면 될 것을 그는 고국으로 귀환합니다. 그의 미래는 정해져 있습니다. 아버지 가계의 유전병으로 인하여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미래에 실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점점 시력은 나빠지고 있고, 안경이 없으면 더듬더듬 어렴풋하게만 사물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어진 규칙을 자유롭게 변형하며 언어를 사용하듯 일상을 살지 못합니다. 누구 한 사람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고국이 왜 그렇게 돌아오고 싶은 곳이 되었을까요?
17살 때 단어가 몸을 막아 말을 잃었던 기억을 사금파리처럼 가진 여자는 다시 말을 잃습니다. 이혼을 했고,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겼고, 어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십니다. 사금파리 같은 그녀의 기억들은 그녀의 말을 빼앗았고, 생활의 활력을 탈취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하는 일은 희랍어를 배우는 일입니다. 아이를 일주일에 한 번 만나던 즐거움도 사라졌습니다. 아이와 함께 도망을 가자는 욕망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규칙이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까요? 그녀는 어떤 문법, 어떤 언어에 억눌린 것일까요?
이들은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우지만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의 소통은 대화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국 아픔은 다른 사람의 아픔이 알아주고 상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상실로 소통되는가 봅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소통이 자유로운 활용을 보장하며 소통이 위로를 제공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하지만 그건 이야기를 읽으며 항상 불편했던 제 마음이 만든 문법일 수도 있습니다.
괜히 제목과 두 사람을 얽었습니다. 문법 속에 갇힌 언어처럼 틀에 갇혀 정해진 시제와 격에 맞춘 생활을 불편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두 사람의 불편과 불행이 희랍어를 모두 배워 자유자재로 희랍어를 쓰면서 아무리 엄격한 문법이 철저하더라도 의사소통이 무난하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위로가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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