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책이란 대체로 두껍습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본문 내용만 601쪽, 참고 문헌, 사진출처, 찾아보기까지는 734쪽의 벽돌 같은 책입니다. 하지만 읽기에 겁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진보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내재적으로 권력자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거나 오로지 기업가의 이익을 위해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내러티브를 만들고 생각의 파라다임을 정하는 자들(권력자들)은 기술의 발전 방향을 정하고 높아진 생산성의 과실을 독점하는 선택을 합니다. 그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선택한 결과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세상이 진보하려면 진보가 가능한 방향으로 기술을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가져야 하고 그런 권력을 가지려면 민주주의 원칙이 사회에 널리 퍼져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이 두꺼운 책의 요지입니다. 요지만 알았다고 책을 읽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지루한 부분은 건너뛰어도 좋고, 재미있는 부분은 자세히 읽어도 좋습니다. 이 책에서 얻은 지식은 다른 사회과학책을 읽는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먼저 진보의 개념을 알고 갑시다. 제가 생각하는 진보란 정치적으로는 주권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사회적으로는 평등이 이뤄지며,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격차가 적거나 없는 사회이며,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고 사상의 자유가 확보된 사회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진보를 반체제, 반자본주의, 종북좌파, 반정부의 뜻으로 이해한다면 이 책은 이해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최근 윤가 탄핵재판에서 피청구인 변호사는 본 사건이 진보 대 보수의 대결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진보란 무엇인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권력은 무엇일까요? “권력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암묵적 또는 명시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자신의 목적에 집중하는 권력은 쉽게 다른 이의 막대한 고통을 포함해 특정한 것들을 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산성이 증가했지만 노동자의 임금은 오르지 않았던 중세 농노사회와 산업혁명 초기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생산성을 높이고 오른 생산성은 인류 모두가 공유하는 번영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어떤 조건에서 충족이 될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책은 모두 11장에 걸쳐 저자의 주장을 펼칩니다. 인간의 역사를 다시 평가하면서 논의를 시작하자는 저자는 지난 1000년간 벌어진 사회적. 경제적 발달 과정을 재해석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발달과정을 테크놀로지의 방향과 진보의 종류를 두고, 또한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되며 왜 그래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졌던 투쟁의 결과로 해석하고자 한다고 설명합니다.
누가 테크놀로지에 대한 투쟁을 이끄는가? 예를 들어 현대 기술이 투입된 운하의 비전은 결국 누구를 위한 비전이었던가? (현대 사회의 디지털과 AI기술의 발전은 누구의 비전?) 권력에 설득된 결과 어떻게 비참함이 육성되었는가? 결국 진보의 피해자는 그동안 누구였던가? 기술의 발전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진 않은가? 그러면서도 진보의 이익을 일부라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은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의 경로를 피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디지털 AI시대에서도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유하는 번영’을 위하여 테크놀로지의 경로를 다시 잡기 위한 관심과 방법을 촉구합니다. 벽돌을 깨는 수고가 아니더라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책을 만드는 시간에 비하면 월등히 작은 수고로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있으니 무척이나 생산적입니다. 덩달아 ‘공유하는 번영’에 대한 비전을 공유할 수 있으니 더욱 좋습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번영을 공유할 수 있는 기술의 방향을 선택할 권력이 주어질 때를 대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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