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에 미소 짓다
작가는 들판 비탈에 누웠습니다. 들판의 풀들이 모조리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풀이 산들바람 속에서 허리가 끊어져라 웃고 있습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풀도 있고, 입술을 반쯤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는 풀도 있습니다. 작가 곁에 꽃 두 송이가 있습니다. 한송이는 작가를 보면서 얇은 분홍빛 꽃잎을 펼치는데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다른 한 송이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렸지만 웃음을 감추진 못합니다. 작가도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합니다. 빙그레 미소 짓다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립니다. 황야에서 혼자 소리 내어 웃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밀밭 남쪽에 있는 풀 속에서 자다가 웃었습니다. 작가는 한 조각 푸르른 풀밭이 너무 좋답니다. 더없이 짙푸른 빛깔이 누렇게 시든 주변 들판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지요. 아마 한 달 전쯤, 밀밭에 물 대는 사람이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그냥 놔두고 자러 갔지 싶습니다. 그 바람에 물이 넘쳐 밭두렁을 넘어가 이 마른 도랑으로 흘러든 덕분입니다. 그러자 오랫동안 시들어 있던 들풀이 드디어 살길을 찾았고 작가는 푸르른 풀 속에 파묻혀 잠들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좋아하는 것과 함께 잠을 자고 꿈을 꾸면 충분하다고 자족합니다. 그러면서 너무 진지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깨닫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은 어느덧 살아간다는 일에 무감각해졌는지 꽃을 보고 미소 짓는 것도, 새순을 보며 설레고 기뻐하는 것도 다 잊었다. 어렵사리 피어난 꽃 한 송이, 모처럼 돋아난 잎새 하나가 황야에서 내 미소를 만나면, 이 작디작은 생명에게 그것은 환영과 격려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 뒤로 작가는 황야의 일원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벌레 한 마리로 들어가는 길이 더 멀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무지를 깨닫습니다. “내가 풀과 나무의 몸에서 얻은 것은 사람의 몇몇 이치일 뿐 초목의 이치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초목을 이해한 줄 알지만 실은 나 자신을 이해했을 뿐이다. 초목에 대해서는 통 모른다.”
생각이란 것이 풍부해지는 조건이 있습니다. 브레인스토밍을 하자고 회의실이나 교육장에서 노력을 해도 잘 안 되지만, 푸른 풀밭이 펼쳐진 둑길에 구름이 만든 그림자가 길게 끌고 저기 강에 뜬 배에서는 어부가 그물을 건지고, 둑 아래 물풀 우거진 자리에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이 보이면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에 잠깁니다. 생각이란 게 원래 시작하기가 어렵지 한번 시작하면 이어지는 것이 습성입니다. 간혹 부끄러운 생각에 혼자 겸연쩍어 풀밭에 드러누워 이리저리 몸을 뒤척입니다. 묶인 염소는 풀을 뜯다 말고 괴이한 행동을 하는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주변 풍경에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품이 커져 석양을 뒤로하고 집으로 오지만 다음 날이면 개뿔 다시 쳇바퀴 도는 일상에 제 한 몸 주체를 못 합니다. 작가는 자신이라도 이해했다지만, 저는 그 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아파트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라서 지금도 짬이 나면 시골로 달려갑니다.
혼자 껄껄 웃을 수 있는 곳, 혼자 꽃에게 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곳, 그래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중국인들도 알면서 이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의 일이 되어 이 작가의 산문에 빠진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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