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인지도 모른 채 소개를 받은 책입니다. 도서관의 서고에서 꺼낸 책은 얇지만 큰 책이었습니다. 그림책입니다. 팡도르가 뭔지 궁금하고, 읽기에 부담이 없을듯하여 빌렸습니다.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 외딴집에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를 잊을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죽음이 나를 잊은 게야.” 할머니는 무심히 중얼거리기까지 합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 겨울, 할머니를 찾아 사신(저승사자)이 왔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할 일이 있다고 하며 사신에게 시간을 법니다. 사신은 할머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할머니가 맛을 보여준 음식들에 마음이 흔들려 할머니에게 시간을 줍니다. 할머니가 만든 음식은 맛이 좋습니다. 과일과 계피에다 황금빛 꿀을 폭포수처럼 쏟고 주걱으로 저을 때마다 솥 안의 반죽은 점점 더 윤기가 돌았는데, 사신은 할머니가 들이민 주걱을 거부하지 못하고 윤기가 도는 반죽의 맛을 본 후 돌아섭니다. 할머니가 사신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거부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할머니는 돌아온 사신에게 빵을 대접합니다. 풍미가 가득한 빵의 맛을 생의 맛이라고 사신은 생각합니다. 사신이 생의 맛을 보았다고 자신의 업무를 팽개칠 정도는 아닙니다. 사신은 처음부터 사신이었을까요 아니면 죽은 후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본 후 사신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사신이 맛을 본 빵의 풍미에서 생의 맛을 느꼈다면 그도 한때는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어 다른 사신과 함께 저승으로 갔던 경험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할머니는 다시 찾아온 사신에게 말미를 얻어 누가를 식히고, 팡도르를 만든 후 아이들에게 먹이고는 사신과 동행합니다. 이제 사신은 할머니를 저승으로 데려갈 일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찰다 속에 할머니의 레시피를 숨겨 두자, “이제 갈 시간이야.”라며 사신과 동행합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강 너머로 사라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산 날이 살날보다 많아진 나이가 되면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김형석 선생의 수필이 기억납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피하려 하늘 높이 숨고, 바다 깊이 숨고, 땅속 깊이 숨었지만 모두 죽음의 사신을 피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부상하고 묻혔다는 이야기입니다. 피하려고 하면 더욱 빨리 달려들 것 같은 것이 죽음인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사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신을 기다리느라 할머니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삶은 삶대로 죽음은 죽음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냥 생을 삽니다.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빵을 만들고, 아이들이 맛을 본 후 할머니가 없더라도 할머니 방법대로 팡도르를 만들 수 있도록 찰다(포춘 쿠키와 비슷한 과자라고 합니다) 속에 레시피를 숨겨두었습니다. 관심을 잃지 않도록 약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할머니는 알고 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는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삶이 몸서리치도록 힘들면 혹시 죽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사는 것이 힘들면 반대편의 죽음이 오히려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듯도 합니다. 할머니는 마을과는 떨어진 외딴집에 살며 외로움을 많이 느꼈을 겁니다. 할머니가 아이들이 모이는 크리스마스에 빵과 과자를 만드는 이유는 음식 자랑도 아니고, 자선을 한다는 마음의 유희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팡도르를 먹이며 잠시 외로움을 덜었을 듯합니다. 할머니는 외로워서 죽음이 자신을 잊은 게 아닐까 가끔 생각했겠지요. 할머니는 외로움을 잊게 한 아이들을 위해 전혀 거리낄 게 없는 죽음의 사신을 잠시 기다리게 합니다. 늘 혼자서 타인의 삶을 마무리하는 사신조차 할머니가 베푸는 친절에 외로움을 잊어갑니다. 외로움은 이렇듯 산 사람이나 저승사자나 힘들게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삶이 힘들고 외롭더라도 주위를 살펴 사람을 찾아볼 일입니다. 아득바득 그렇게 찾을 것이 아니라, 문득 소리 없이 안개처럼 찾아오는 인연들을 소중히 맞는 마음을 항상 준비하면 될 듯합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백세인생이라는 대중가요가 생각났습니다. 할머니는 나이가 몇이었기에 선뜻 사신의 손을 붙들고 먼저 집을 나섰을까요? 궁금합니다.
"육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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