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1980년 5월 24일. 조성기 장편소설. 한길사 간행2

무주이장 2023. 8. 2. 23:40

책을 읽던 중 몇 가지 생각의 정리

 

  책을 읽던 중 몇 구절에서 일어난 생각을 정리합니다.

 

  김재규가 2월 28일 ‘옥중수양록’에 쓴 내용이라고 합니다. “만일 내가 사형선고가 없이 견성할 수가 있었겠는가. 육신, 즉 유한생명을 바치고 무한생명 부처를 찾았다. 불행이 지혜의 눈으로 보면 곧 행복이 된다는 진리를 입증해 주었다.”(324쪽)

 

  교회를 찾는 경우는 대개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라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졌던, 누구의 전도로 하나님을 찾았던, 위기가 극복이 되거나 사라지면 사람들은 교회의 필요를 덜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굳이 하나님에게 부탁할 일이 없어져 행복한 일상을 살 수 있으면 교회에 가는 시간에 다른 기쁨을 주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비슷한 것인가 봅니다. 김재규는 사형선고를 받자 그 불행이 부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지혜의 눈이 떠졌다며 진리를 찾았다고 느낍니다. 그의 불행은 부처를 찾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불행으로 인하여 부처를 찾은 일을 축하할 일인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부처를 찾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인데, 그 조그만 기쁨으로 인하여 타인의 생명을 끊고 스스로도 목숨을 버리게 된 사건이 자그마해져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사형 집행 후 극락에서든, 남의 목숨을 끊은 죄가 있어 지옥에 갔든 부처를 찾은 그 후의 이야기가 허무하지 않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고 예수님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 믿음의 정수라고 교회에서는 가르칩니다. 절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요. 유교라고 다를 것도 없는데, 그는 부처의 발견에 너무 큰 방점을 찍습니다. 이와 비슷한 단정적인 그의 생각은 책의 곳곳에서 보입니다.

 

  박정희가 카터 미국 대통령과 만나고 난 뒤 한 말이라고 합니다.

“카터는 역시 촌놈이야. 땅콩농장 출신이야. 이번에 나한테 당하고 갔으니 창피해서 어떡하나.”(344쪽)

어디에서 들었던 얘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억나지 않나요? 옮겨 보겠습니다.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또는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가오를 잡는 방법이 비슷한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에게 쪽을 팔고 나면 조그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며 상대를 조롱하는 태도 말입니다.

 

  작가는 책의 끝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내가 김재규의 생애와 내면을 통관해 보고 내린 결론은 시대의 흐름 자체가 박정희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재규 개인이 박정희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박정희를 죽인 셈이다. 그 시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염원이 김재규라는 인물 속에 투입되었고 그는 그들의 의지와 염원을 대리하여 표출하고 실현된 셈이다.”(372쪽)

 

  작가는 자기들만의 리그 속에서 '물리적인 폭력'과 '경제적인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들이 '의식들 간에 벌어지는 투쟁'의 치열함 속에서 서로 총질을 했다고 설명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국민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면 국민의 이야기가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전해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이든 갑자기 결론이 정해진 답으로 나오면 당황스럽지 않나요? 이런 경우 요즘 젊은이들은 '답정너'라는 표현을 씁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하면 돼’ 그런 뜻이랍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