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현대 역사 2
크메르 공화국(1970년 - 1975년)
1970년 3월 17일 친미 론 놀이 시하누크의 외유 중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10월 9일 시하누크 일파를 추방하고 크메르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론 놀은 정권을 탈취하면서 강력한 반 베트남 캠페인을 실행하여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의 지원이 의심되는 캄보디아 거주지 내의 베트남계 주민을 박해, 학살하였다. 이 때문에 시하누크 시대에 50만 명이었던 베트남계 주민 중 20만 명이 1970년에 베트남으로 대거 귀환하는 사태가 지속되었다. 이어 론 놀은 1970년 4월 호찌민 루트를 분쇄하기 위해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자국을 참전시켰다. 게다가 1968년부터 국지적으로 행해져 오던 미군에 의한 캄보디아 공중 폭격을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을 포함한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미군의 폭격으로 수십만 명의 농민이 희생이 되었고, 대량의 난민이 발생해 농업 생산은 격감했다. 론 놀 정권은 국민의 반감을 사서 반정부 활동은 격화되었다.
론 놀의 쿠데타 이후 시하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해 캄푸차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반 론놀 공동투쟁을 호소하였다. 시하누크를 캄보디아로 귀국시킨 세력은 당시 모택동주의(마오이즘)에 심취한 폴 포트, 키우 삼판, 이엥 사리 등이 지휘하는 공산주의 세력 즉, 크메르 루주였다. 10월 폴 포트는 시하누크를 옹립하였고, 론 놀 정권과의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1971년 1월 미국은 론 놀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남베트남 파견군의 일부를 캄보디아에 투입했다. 10월 론 놀은 군사 독재체제를 선언하고, 1972년 3월에 신헌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1973년 3월 29일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 철수를 했기 때문에, 론 놀은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다.
민주 캄푸차(1975년 - 1979년)
1975년 4월 17일 세력이 약해진 론 놀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4월 30일 베트남에서는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후 크메르 루즈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캄보디아 민주 헌법을 공포하여 국명을 민주 캄푸차(Democratic Kampuchea)로 개칭하였다.
내전에 의한 농업 인프라의 파괴, 식량수입 원조가 중단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크메르 루주는 화폐 제도를 폐지하고 도시 주민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켜 강제 노동을 시키는 극단적인 원시 공산제 사회로의 회귀 정책을 실행하였다. 구정권 관계자나, 도시의 부유층, 지식인, 유학생, 크메르루주 내의 친베트남파 등을 학살하여 킬링필드를 만들었다. 반란의 혐의가 있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 S21(현 뚜어슬랭 학살 박물관) 등에 수용되어 학살되었다. 1975년~1979년의 폴 포트 시대의 4년간은 중국의 마오쩌둥주의를 표방하여 극단적인 농본주의 정책이 채택되었지만, 비효율적인 방식은 큰 가뭄을 극복하지 못했고, 출생률이 비정상으로 저하되는 한편, 기아와 학살로 100만 명이 넘는 대량의 사망자를 냈다.
1978년 1월 베트남을 침공한 폴 포트는 베트남과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 당시 베트남은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중-소 대립의 구도 때문에, 중국과 관계가 깊은 폴 포트 정권과 대립하게 되었다. 5월에는 폴 포트가 반란의 혐의로 동부군 관할구역을 공격해 동부지구에서 대규모의 크메르 루주 장병이 처형되었다. 이 때문에 베트남에는 10수만 명에 달하는 동부지구 지역의 피난민이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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