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전우용, 그를 안 것은 그가 출연하는 방송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묻는 어떤 말에도 거침없이 기원과 출처를 알려주고,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정확한 용례와 잘못된 용례를 드는 해박함에 놀라서 그가 쓴 책을 읽으면 나도 상식이 늘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부려 고른 책입니다. 개가 달을 보고 짓는다는 말인데, 달이야 원래 항상 언제나 그 시각에 그 자리에서 뜨고 지는 것인데 개가 달을 보고 짓는 것은 어떤 연유일지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을 하나씩 같이 해결하는 의미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의료보험제도의 역사
우리나라 의료보험법은 1963년에 처음 제정되어 1964년부터 시행됐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무상의료’를 자랑하는 북한에 맞서기 위해 ‘선전용’으로 이 제도를 만들었지만, 임의가입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입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보험료를 분담하는 강제 가입 방식의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된 건 1977년이었습니다. 이때는 공무원, 군인, 교사, 상시 500인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 노동자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은 유신체제가 종말을 향해 치닫던 때였습니다. 특히 당시 주력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분야 대기업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저임금에 불만이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리라고 판단한 박 정권은 대기업 노동자들을 회유하는 한편, 공무원 군인 교사 등 정권의 중추를 이루는 사회 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특권적 의료보험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의료보험증은 특권층의 신분증 구실을 했습니다. 의료보험증만 맡기면 어느 술집에서나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1981년 이전 제가 다녔던 대학 정문과 후문 앞 주점에서는 학생증을 맡기고 외상술을 먹었다던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학령인구 대비 15.7%가 대학을 진학했고 그 수는 57만 명이었습니다. 당시 인구는 3,744만 명입니다. 대학생은 전 국민의 1.5%였습니다. 검색이 안 되는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대학생 친구 한 사람만 있었어도…”라고 했을 정도로 대학생은 희귀했고, 특권을 가진 부류였던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2010년은 학령인구의 110.5%인 295만 명이 대학생이며 전체 인구의 6%를 차지합니다. 지금 학생증을 맡기면 외상술을 주지 않습니다. 외상술을 비유로 특권을 얘기하는 것이 저에게는 현실감이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의료보험은 일부 사람만 혜택을 받는 ‘미국식 의료보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의료보험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면, 중소기업 직장인이나 자영업자 절대다수는 코로나에 감염되어도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겁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정당 노태우는 ‘전 국민 의료보험 혜택’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료보험증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양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증거물’이었기 때문이죠. 이 ‘가시적인 불평등의 증거물’을 없애지 않고서는, 6월항쟁으로 뜨겁게 분출한 민주화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현재의 국민 건강보험 제도는 박정희가 준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 스스로 살인적 폭력과 최루탄에 맞서 싸워 만든 제도입니다. 자기 자신이, 또는 자기 부모가 싸워서 얻은 권리를 남이 ‘선물’ 한 것으로 생각하면, 허무하게 빼앗기기 쉽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을 누구라도 함부로 훼손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민영 의료보험증’을 가진 사람이 공공연히 특권층 행사하는 시대로 되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업적 중 하나가 의료보험 제도라는 말을 너무도 자주 들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역사를 통하여 의료보험이 만들어졌는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의료보험의 민영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알겠습니다. 온고지신입니다.
PS: 요즘 실업급여를 시럽급여라고 비난하면서 실업급여계정의 고갈을 우려해 급여액을 낮추려고 합니다. 2019년 고용노동부의 정책브리핑을 보면 실업급여계정은 경기가 좋으면 흑자가 났고, 경기가 좋지 않으면 적자로 돌아섭니다. 그러면서 향후 경기회복 등 여건이 개선되고, 전입금 확대 등 재정안정화 조치를 지속할 경우 기금 고갈에 대한 우려는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경제정책이 실패하면 실업자는 늘어나고 실업급여도 늘어납니다. 실업급여는 근로자를 보호하는 사회보험입니다. 가진 자들이 아니라 못 가진 자들에 대한 보호 수단입니다. 가진 자들에게는 세금을 깎고 실업자에게는 실업급여를 깎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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