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전우용, 그를 안 것은 그가 출연하는 방송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묻는 어떤 말에도 거침없이 기원과 출처를 알려주고,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정확한 용례와 잘못된 용례를 드는 해박함에 놀라서 그가 쓴 책을 읽으면 나도 상식이 늘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부려 고른 책입니다. 개가 달을 보고 짓는다는 말인데, 달이야 원래 항상 언제나 그 시각에 그 자리에서 뜨고 지는 것인데 개가 달을 보고 짓는 것은 어떤 연유일지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을 하나씩 같이 해결하는 의미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용어 풀이, 사용례: 공평과 공정
뜻이 다르기에 말이 다른 것인데도, 일상생활에서는 둘을 ‘사실상 같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공평’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으로, ‘공정’을 ‘공평하고 올바름’으로 정의한 국어사전 탓도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권투에는 ‘체급’이 없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생래적인 체격 차이가 경기력에 그대로 반영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한자 ‘공公’은 지상에 구현된 하늘의 도리라는 의미라고 쓴 적이 있는데, 공평도 인간 사이의 평등과는 별 관계가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조선왕조 개창 직후 한양으로 천도할 때, 왕은 한양으로 이주하는 개경 주민들을 신분과 지위에 따라 구분하여 집 지을 땅을 ‘차등 있게’ 나눠 줬습니다. 이 ‘차등’을 전제로 해서 같은 등급 내에서 균등하게 또는 평등하게 나눠 주는 게 ‘공평’이었죠. ‘공평’이 인간 사이의 ‘평등’과 비슷한 개념으로 옮겨 온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권투에서 체급이 생긴 것도 19세기말입니다.
공평이 평등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동하면서, 그 기준을 정하는 건 대단히 어려워졌습니다. 현대의 사회적 갈등은 대부분 ‘공평’을 둘러싸고 벌어집니다. 뷔페식당에서 체격이 큰 사람에게나 작은 사람에게나 똑같은 액수의 돈을 받는 게 공평한가?(제가 덩치가 크서 그런지 이런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 여성 전용 주차 구역 설정 등은 공평한 행정인가? 등등. 민주주의 시대의 ‘공’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다수의 뜻이기 때문에, 사안별로 무엇이 공평인가에 대한 답은 ‘공론의 장’에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법과 제도는 이 ‘공론’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제 ‘생래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생래적 약점’을 가진 사람에게 일정한 혜택을 주거나 ‘생래적 장점’을 가진 사람에게 일정한 핸디캡을 부여하는 게 ‘공평’이라는 인식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헌법을 배울 때 ‘실질적 평등’을 처음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말도 있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혜택이나 핸디캡의 ‘정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완전한 합의가 불가능할 겁니다. ‘불공평’에 대한 분노와 불만도 완전히 사라질 수 없을 겁니다.
'공평'이 체급을 나누고 체급 내, 또는 체급 사이의 규칙을 정하는 것과 관련된 개념이라면, '공정'은 그 규칙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헤비급 선수와 플라이급 선수를 똑같은 조건에서 맞붙게 해야 하는가, 헤비급 선수 한쪽 팔을 묶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예 같은 링에 서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가를 정하는 게 '공평'의 문제라면, 일단 링에 오른 선수들이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건 '공정'의 문제입니다. 이 대결이 '공평'한지 아닌지는 세계권투위원회가 정하고, '공정'하게 진행되는지 아닌지는 심판이 판단합니다. 법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는 일도 '공정성'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규칙을 위반해도 눈감아 주는 '편파'가 불공정입니다.
조국 교수 딸 입시문제로 분노하는 젊은이들, 본인의 분노가 ‘불공평’ 대문인지 ‘불공정’ 때문인지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비급 선수가 플라이급 선수를 맞상대하는 건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그가 만든 게 아닙니다. 그가 경기규칙을 지켰다면, 분노는 ‘불공평한 제도’를 만든 조직이나 기구를 향해야 합니다.
학부모 활용 인턴십 제도를 만들어 학부모 사이에 쌍방향이든 단방향이든 ‘선심 베풀기’를 권장하고, 세계선도인재전형을 만들어 외국 생활했던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입시 기회를 제공한 건 이명박 정부와 지금의 자유한국당 정치세력입니다(저자의 글은 2019년 8월 30일 작성되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고, 법인세 인상에 반대하며, 복지 확대에 반대하여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을 더 확대하려는 세력도 저들입니다(실업급여가 시럽급여라고 한 정당, 법인세를 감면하고는 이제는 기대할 수도 없는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정당, 최저임금인상을 반대하는 정당은 국민의 힘입니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 힘은 이름만 바꾼 정당이 확실합니다. 지금은 2023년 7월입니다).
저들이 만들어 운영했던 그때의 제도가 원천적으로 ‘불공평’했습니다. 그 ‘불공평’의 책임은 당시 일반 시민은 물론 권력에서 배제된 ‘상류층’에게도 물을 수 없는 겁니다. 불공정이 아니라 불공평이 문제라면, 지금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비난이 향해야 할 대상은, 그런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던 정치세력입니다.
공평과 공정이 사용된 역사적 사례를 설명하며 설명하는 논리가 벼린 칼날처럼 예리합니다. 말은 부드럽지만 뜻은 강직합니다. 함부로 휘둘리는 여론은 분명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 선동선전에 쉽게 휘둘리는 것이 여론이라는 믿음을 지금의 집권세력들은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그들의 이러한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말을 해도 포장해서 호도하는 언론을 강제하는 것이지요. 별로 귀족적이지도 않은 공무원은 신분제가 확대되고 공고해져야 한다면서 국민을 개, 돼지에 비유했습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주민들이 이장을 잘 따르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장은 “잘 멕여야 해”라고 합니다. 어떤 지도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지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때 드러납니다. 정확한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할 말은 않는 지금의 언론을 보면서 선생의 글이 시간을 넘어 힘이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의 부인이 명품을 샀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대통령을 수행하는 기자가 누구길래 한마디 말도 한 줄 기사도 없습니까? 그런 뉴스를 리투아니아 신문을 통해서 듣는 게 한심합니다. 밥만 축내는 놈을 우리 할머니는 식충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레기보다 더한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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