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전우용, 그를 안 것은 그가 출연하는 방송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묻는 어떤 말에도 거침없이 기원과 출처를 알려주고,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정확한 용례와 잘못된 용례를 드는 해박함에 놀라서 그가 쓴 책을 읽으면 나도 상식이 늘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부려 고른 책입니다. 개가 달을 보고 짓는다는 말인데, 달이야 원래 항상 언제나 그 시각에 그 자리에서 뜨고 지는 것인데 개가 달을 보고 짓는 것은 어떤 연유일지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을 하나씩 같이 해결하는 의미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개혁과 수구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안동 김씨 균자 항렬 사람들은 전부 이름을 바꿨습니다. 남양 홍씨 식자 항렬 사람들도, 반남 박씨 영자 항렬 사람들도, 대구 서씨 광자 항렬과 재자 항렬 사람들도 모두 이름을 바꿨습니다. 저들은 자타공인, 당대 최고의 ‘금수저’ 가문이었습니다. ‘명문대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축출했다고 선포하는 집단 행위를 한 거죠.” 처음 듣는 설명입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후한을 두려워한 가문에서 보신책으로 ‘족보에서 파버린’ 제가 알게 된 첫 사례입니다.
선생은 김옥균 등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며 그들이 평생 기득권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려 했다면, 세상을 그대로 두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개혁이란, 자기 존재의 조건을 바꾸는 행위인데, 김옥균 등은 한편으로 자기 존재 자체가 주는 혜택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려는 이율배반적 면모를 보였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를 비난하면,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개혁 대신 혁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가들은 이 ‘불일치’ 때문에 상층이나 중간 계층 출신 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의 극단을 보여준 게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지지지들까지 ‘기회주의적 지식 분자’로 몰아 학살했습니다.” 갑신정변에서 폴 포트로 이야기가 확장됩니다. 선생이 하고 싶은 얘기는 다음입니다.
“자기도 기득권 세력의 일원으로 살았으면서 말로만 개혁을 주장했다며 조국 후보(2019년 당시 신분)를 비난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수많은 개혁주의자가 많건 적건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를 문제 삼아 개혁 세력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하는 건 ‘반개혁세력’의 고정 레퍼토리입니다. 이런 비난에 동조하면, 기득권 가문에서 태어나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는 데에만 몰두한 사람들이 오히려 일관성 있고 솔직한 사람으로 보이게 됩니다. 당대의 ‘기득권 구조’를 유지하는 게 도덕적으로 보이는 역설의 현상이 나타나는 거죠.”
그러면서 선생은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 같은 해,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했던 조국 씨와 나경원 씨를 비교합니다. ‘개인적 도덕성’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도덕성’ 차원에서 두 사람의 존재와 존재를 비교하고, 의식과 의식을 비교하라고 권합니다. 기득권 세력 중에는 나경원 씨처럼 ‘존재와 의식의 일치’를 보여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면서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고 고착되는 것은,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 때문이 아니라 ‘존재와 의식의 일치’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는 개혁의 중요한 동력이고, ‘존재와 의식의 일치’는 수구의 일관된 원칙입니다.” 이렇게 글을 맺습니다.
제가 ‘사건을 보면서 기원과 출처를 제시하고,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정확한 용례와 잘못된 용례를 드는 해박함’이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잘 드러나는 글입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주장에 반박하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주장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 반박문이 있으면 소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P.S. 어제 본 '킹더랜드' 예고편에서 구원이 누나에게 "내 사람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말에 대답한 누나의 대사가 기억납니다. "남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을 못 이겨"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 대 '존재와 의식의 일치'가 맞붙는 상황이 다음 화부터 전개될 모양입니다. 준호와 윤아 둘 다 너무 예뻐 유치한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존재와 의식의 관점에서도 재미있게 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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