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볼트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다.
시드볼트란 씨앗(seed)을 저장하는 금고(vault)입니다. 기후 변화나 핵전쟁 등 지구 차원의 대재난에 대비해 식물의 멸종을 막고자 마련된 공간입니다. 시드볼트와 유사한 기관으로는 시드뱅크(seed bank)가 있는데, 시드뱅크가 그때그때 필요한 씨앗의 입출고가 가능한 공간이라면 시드볼트는 절대로 열려서는 안 되는 장소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시드볼트나 시드뱅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십 편의 시가 자신을 관통해 가는 동안에도 굳게 닫힌 자신의 시드볼트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까지도 지키고 싶은 나의, 나의 가장 내밀한 장면들, 쓰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쓰고 나서도 번번이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가 시인의 시드볼트에 저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인이 말한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시드볼트가 나에게는 어디 있지?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내가 끝내하지 않는 말, 단어가 튀어나오면 스스로도 깜짝 놀라게 되는 그런 말들이 들어있는 금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만, 이야기를 할 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하고 나서도 번번이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가 보관된 금고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금방 후회한 경우가 많아 지금이라도 시드볼트를 만들자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부하직원이 경솔하게 구두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부풀렸습니다. 구두 보고를 받은 사주는 품의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직원은 이번에는 신중하게 여러 곳을 조사하고 대안을 확인한 후 품의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사전에 구두 보고가 있었다는 내용을 알지 못한 저는 결재를 하고 사주에게 보냈습니다. 사주는 구두 보고에서 보고한 금액보다 훨씬 줄어든 품의서 상의 금액에 화를 냈습니다. 저도 신중하게 조사한 후 구두 보고를 하라고 직원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특히 돈과 관련한 보고는 오해의 소지도 있으니 더욱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직원은 죄송하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이 안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회의 때마다 사주는 부하직원을 도둑놈이라며 질책을 하는 겁니다. 직원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지 말고 조금 더 기다리면 사주도 마음을 풀 것이라고 위로를 하였습니다. 잘못한 것은 사실이니 참으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직원은 도둑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침 회의 참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직원의 마음은 깨지고 부서졌습니다. 그날 아침 회의에는 회의실의 자리가 다 찼습니다. 사주는 도둑질한 직원을 매도하는 이야기로 회의를 시작하였습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비웃는 웃음으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웃은 이유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회장님의 지시를 받고 섣불리 경솔하게 깊이 없이 조사하여 가볍게 보고를 한 사실은 직원도 인정을 합니다. 보고가 정확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질책을 하는 것을 직원은 달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품의를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정확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앞선 잘못을 시정하였습니다. 직원이 허위로 비용을 부풀려 보고를 하고 차액을 횡령하려고 한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한 데 자꾸 도둑이라고 말씀하실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의실이 냉동실로 변했습니다.
저에게 시드볼트가 있었다면 절대 열리지 않았을 금고 속의 말이었습니다. 그때 시인의 책을 읽고 시드볼트를 알았다면 말입니다. 그저 듣고 입만 닫으면 될 일인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2017년 어느 날의 에피소드입니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는 걸 막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국제적인 망신을 받을 일이 되었습니다. 실제 막을 방법도 없다고들 합니다. IAEA보고서를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오염수를 방류하면 수산업이 망한다고 말을 하면 수산업을 방해하는 일이라고 업무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가짜뉴스라는 말로 오염을 시킵니다. 오염수와 처리수의 차이는 대통령을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로 갈립니다. 그래도 방송을 통해서 듣거나 기사를 보는 것은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것이라 그저 그러려니 합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 쉽게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있음에 자신감과 함께 자존감도 커졌습니다. 그런데 퇴근길이었습니다. 사주(이 사주는 그때 그 사주가 아닙니다)와 함께 퇴근하는 차속에서 갑자기 사주가 그럽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하여 토론을 하자고 하는데, 반대하는 쪽에서는 참가하려는 패널을 구할 수가 없대. 시민단체에서만 패널이 나온대.” 그냥 듣고 말 일입니다만 ‘어? 정말 그런가? 그럼 내가 듣는 방송에 출연한 과학자들은 누구지?’ 토론장의 분위기나 상대 토론자가 누군지에 따라 패널이 출연을 꺼렸을 경우도 있을 것이고,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반대한 과학자를 방송국에서 기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처음 튀어나온 나의 말은 “나가서 반대하면 압수수색을 할 것 같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말하고 바로 후회를 했습니다. 그 뒤의 상황은 차마 부끄러워 말을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도 저는 제 할 말만 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상대방의 동의는 구하지 못한 것은 물론입니다.
2023년의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기 직전에야 시드볼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열려서는 안 되는 말들이 저장되어 있는 금고. 인류가 멸망을 예고하고서야 열려야 하는 최후 희망의 공간이 시드볼트입니다.
시인은 “문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슬픔이라고 말하는 대신 복숭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슬픔은 안으로 감추고 복숭아 이야기만 실컷 하는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저에게는 시드볼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감추는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을 확인합니다. 제가 느끼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복숭아”라고 말했다면 상대도 흥분하지 않았을 일을, 그러면서도 위로를 전할 수 있었을 일을 날선 말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왜 복숭아가 문학적인지 책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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