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어크로스 간행 2

무주이장 2023. 7. 2. 15:53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보지 못한 영화에 관한 평을 읽는 것은 고통입니다. 평론이란 것이 글이 난삽한 이유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를 설명하고 미장센을 이야기하고 영화 속 숨은 철학을 스크린에서 보고 설명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는 지면에서 읽는 난감함 때문입니다. 그럼 건너뛰면 되지 않겠니 하고 글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호의를 표하겠지만, 책을 빌렸든 샀든, 사람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그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고통 속에서 책장을 넘기다가 제가 본 영화에 대한 평론이 보였습니다. 인생도 그렇지만 책 읽기도 비슷한 모양입니다. 희로애락이 제 나름의 주기를 가지고 널뛰듯 하기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입니다.

 

  악의 화신인 한니발 렉터는 섬찟하지만 매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아이러니하게도 악의 화신을 사랑하게 된 것은 우리가 정반대의 아이러니에 오랫동안 시달려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학자에게서 무지와 편견을, 긴 역사에서 부박함을, 예술지상주의에서 세속의 극치를, 성직자의 주머니에서 더러운 돈을, 혁명가에게서 보수성을, 군자에게서 파렴치함을, 권좌에서 도둑놈을, 성소에서 추악함을 보아왔다.”라고 설명합니다. 한니발의 식인이나 잔인함에게서 보다는 가장 저열한 인간형을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선의 이름으로 한니발을 쫓는 공권력 안에서다는 설명입니다. '람보'가 주방위군의 포위를 피해 추운 겨울 강물에 숨어 머리를 드러낼 때 그를 응원하며 박수를 쳤던 관객이 떠올랐습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륵 하고 영화가 머릿속에서 재상영을 시작하였습니다. 한니발에 대한 이런 이해는 일부라고 하면서 저자는 설명을 이어갑니다.

 

“한니발에게서 경탄스러운 점은 그가 공권력과 같은 거대한 적이나 메이슨과 같은 백만장자와 싸우되, 놀랄만한 능력으로 그러한 강적을 제압하는 데서 우선 온다. 그는 상대를 제압하되 유유히 제압하며, 싸우는 그 긴장된 순간에마저 침착함에서 나오는 기품을 잃지 않는다”

 

  한니발의 힘은 지식에서 나옵니다. 심리학의 전문가답게 적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으며 그의 상황 판단은 늘 정확합니다. 상영되는 화면이 보이시지요? 정보를 축적하는 일이 지식이지요. 그는 지식을 통해 뭇 대상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의 마력에 홀리는 이유는 그 대상에 대하여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니발은 그가 가진 냉정한 지식으로 인하여 자신과 대상의 관계를 내면화하여 쓰레기 같은 인간에 대한 신비감이나 경외감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학교 동창의 집에 찾아가 아버지의 진료 모습을 훔쳐보며 환상에 빠졌던 아이들과는 달리 아버지인 의사는 어떤 환상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한 동창들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될 듯합니다. 한니발이 그래서 인간을 ‘먹을’ 수 있는 이유랍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들어봅니다.

 

  한니발의 식인은 저자는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경멸과 모욕의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냉정한 지식을 가져서 대상에 대한 부질없는 매혹으로부터 자유로운 한니발에게 정말로 경멸스러운 인간들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니발이 아이에게 인육을 건네주는 한니발의 다감한 눈은 그에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마저 인육을 주는 잔인한 한니발을 연상했던 저의 생각을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니발이 냉정한 지식으로 구원을 받아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라면서 구원의 수단으로 사랑을 말합니다. 구원은 기꺼이 스스로 목매고 싶은, 스스로 그것 때문에 부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어떤 대상을 찾는 경우라면서 그가 스탈링을 사랑한다고 설명합니다. 냉정함과는 다른 한니발의 모습입니다.

 

  “한니발이 스탈링에게 품고 있는 애정이 절절하다고 하여, 그것이 곧 감정적 격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니발은 스탈링에 대해서 흥분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랑은 우리가 현실의 연애담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너절한 사랑보다 훨씬 로맨틱하다” 스탈링이 그녀의 팔과 한니발의 팔에 수갑을 엮고 수갑열쇠를 주지 않고 버티는 중에 한니발은 팔을 베고서라도 수갑을 풀겠다고 하면서 열쇠를 요구하지만 스탈링은 열쇠를 주지 않습니다. 드디어 한니발은 팔목을 벱니다. 하지만 스탈링의 팔이 아니라 그의 팔목을 벱니다. 팔목을 베는 순간 화면은 백색으로 변하고 너무 환하여 저자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연인들 중에서 그토록 로맨틱한 사랑은 보지 못했으므로 그랬다고 저자는 그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거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글이 되었습니다.

 

  저자의 영화평은 예술론으로 연결됩니다.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에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를 들어 “자아 창조의 과정은 개인을 사회에 통합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티테제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라고 글을 이어면서 “한니발 렉터의 경이로움은 단순한 세상과의 불화를 넘어, 자신의 생을 자신이 창조하는 예술의 무대로 만들고, 그 위에서 자신만의 예식을 집전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한니발의 모습은,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예술을 통해 독립된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세상에 복수하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의 모습을 닮았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이렇듯 단순한 오락 영화로 보았던 잔인한 영화 속 살인마 한니발 렉터를 박식한 지식인, 다정다감한 로맨티시스트,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둔갑시켰습니다. 피트니스센터의 트레이닝 코치를 따라 늘 쓰던 근육을 반대로 움직여 이완시키고 피로를 풀듯이 저자를 따라 영화를 가상의 스크린에서 재상영하며 예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았습니다.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미진함도 풀었고, 한니발을 오해한 부분도 정리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는 자세가 책을 읽는 것이라는 말을 저자는 합니다. 경청했습니다. 본 영화는 두 번 보지 않는 습관인데 이 영화는 다시 봐야겠습니다. 저자의 주석을 대화창에서 같이 두고 영화를 볼 생각입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