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그림 중앙에 크게 그렸습니다. 배경은 이태원이 아닙니다. 그의 옆에는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지금 파악을 하고 있고요” 이태원에서 일어난 10.29 참사 유가족은 그림 오른쪽 귀퉁이에 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옆에 또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용산구청으로 출근하는 박희영 구청장을 그림 중앙에 크게 배치했습니다. 10.29 참사에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했다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다가 보석으로 풀려나서 업무에 복귀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유족들은 왼쪽 구석에 역시 점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탄핵 심판 중인 행안부 장관과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용산구청장입니다. 이태원의 유족들이 이들에게서 받은 상처와 이들의 허술한 사고 대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태원 유족들의 근황은 최근 소식이 뜸합니다.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라 요구하며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잠깐 들었을 뿐입니다.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핼러윈데이를 즐기다 사고로 죽은 것이 무어 대수냐며 오히려 꾸짖고 나무라던 초기의 말들이 아마 아직도 어디에선가 난무하고 있을 것입니다. 놀러 갔다가 부주의하거나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국가에 처벌을 요구하냐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욕을 해댑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일본이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오염수를 과학적으로 정화해서 바다에 방류하기로 한데 대해 국민의 힘에서는 괴담으로 횟집이 망하면 방류에 대해 비판한 야당의 책임이랍니다. 이거 누가 비유하기를 “독립운동한답시고 (독립도 이루지 못하면서 섣불리 일본군을 공격해) 피해를 본 일본군인들이 이를 핑계 삼아 우리 동포들이 살해되고 집이 불탄 피해를 보게 됐으니 독립운동가들이 나쁘고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공격하는 친일파와 다를 바 없다고 했던데 공감이 갑니다. 이제 친일이 계급장이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일본과 가치가 동일했던가 우둔한 머리를 때려봅니다.
약학대 교수 한 분이 방류수를 희석해서 먹을 수 있다고 한 이유는 들을 만은 합니다. “국민 정서에도 국가 경제에도 도움 되지 않는, 그렇다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막을 수 있는 실질적 수단도 보이지 않는 소모적 논란이 과학과는 동떨어진 주관적 견해들에 의해 증폭돼 국민의 공포만 키워가고 있다" 이 교수님은 대신 조건을 달았습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제반 시험 성적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주변국에서 요구하는 경우 시료 직접 채취를 허용해 이중 확인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우리 견학단은 일본에 가서 이 교수가 요구한 조건에 알맞은 일을 하고 왔던가 모르겠습니다. 똥 낀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10.29 참사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도 아닙니다. 책 ‘더 파이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화이트채플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 ‘잭 더 리퍼’와 관련된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살인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에게 살해된 여성 다섯 명이 주인공인 이야기입니다. 1888년 8월부터 11.29일까지 총 다섯 명의 여성이 살해되었는데 피해자의 이름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채 ‘매춘부’로만 기억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잘 죽었다거나, 더러운 거리에서 더러운 사람이 청소되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1888년에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검색하니 흥선대원군과 싸우던 민 씨가 집권을 해서 척족세력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와 중첩이 됩니다. 이때 민초들이 사는 것이 무어 그리 행복했겠습니까. 이 당시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낮은 임금으로 허덕이며 살았고, 특히 여인들의 삶은 남자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고,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일상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도덕적 완결성을 요구받아 간통 사건이라도 나면 모든 책임을 여성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환경이고, 여성의 노동력은 똥값이라 하루 먹고 잘 수도 없는 상황에서 생존전략인 남성과의 동거는 매춘부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연쇄살인범의 피해자 모두는 남편을 잃거나 헤어져 경제적으로 나락에 떨어져 어쩌다 벌거나 적선 받은 돈으로 현실의 고통을 피하고자 알코올에 의존하는 삶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노숙하다가 살해되거나, 깨진 창문의 집에서 쉽게 침입한 살인자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경찰과 언론은 이들 피해자들이 매춘부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매춘부로 만듭니다.
아직도 잡히지 않은 살인자 ‘잭 더 리퍼’는 오늘도 영국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지만 피해자의 고통과 삶의 흔적은 관심이 없습니다. 화이트채플에서는 살인 현장을 방문하는 관광상품이 버젓이 팔리고 있고, 잭 더 리퍼를 미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모양입니다.
1888년과 2022년 그리고 2023년 영국과 한국의 모습이 같아 보이진 않으십니까? 그저 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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