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시집. 문학과지성사 간행

무주이장 2023. 5. 28. 18:48

슬픔을 간직한 자를 위한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오래된 모양입니다. 아니면 너무도 익숙한 거리처럼 오랫동안 본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요? 그런데  끝에서 갑자기 싸해집니다. 이 청혼 이상합니다.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청혼의 자리에서 축배가 아닌 쓴잔을 모두 마실 것을 작정합니다. 쓴잔에는 투명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슬픔이 담겨있습니다. 마실 수 없는 잔 같은데 그는 기꺼이 마신다고 합니다. 날카로운 유리가 목을 자를 듯 듣기만 해도 고통스럽습니다. 시의 제목은 청혼입니다. 청혼이 이렇게 아픕니다. 이런 결혼을 왜 하려고 할까요?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아이들이 어머니의 심장에 떨어집니다. 겨우겨우 밤하늘에 붙어있던 아이들이 떨어집니다. 까맣게 탄 어머니에게 떨어집니다. 시인은 당황합니다.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한밤중 쏟아지는

폐병쟁이 별들의 기침

언어의 벌집에서 붕붕대는 침묵의 말벌들

시는 침묵이 됩니다. 폐병쟁의의 맥없는 기침 같고요. 그저 고요히 모여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이 청혼을 한 상대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화려한 결혼식이 아니라 아픔을 나누고 슬픔의 쓴잔을 같이 마시는 의식으로서의 청혼입니다. 청혼하지 않고는 그의 슬픔을 나눌 방법이 없어 유리 조각을 넘기는 고통을 견디고 슬픔을 나누자고 하는 의식입니다.

 

무기력을 만드는 일상

 

청혼이 어쩌다 이렇게 장렬해야 합니까? 세상은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청혼의 자리에서 쓴잔을 마셔야 한답니까?

모든 것은 다 옛날의 일. 한 젊은이가 탑으로 올라왔

, 부드러운 머리결을 잡고서. 천 번의 벼락을 맞았다,

마녀에게서. 그는 핏물로 갓 칠해진 의자에 앉아 나를 간

신히 바라보았다, 발효된 빵처럼 부푼 눈꺼풀로. 세월이

흘러 그는 한겨울의 마지막 밤에 죽었다. 경제학을 잠시

공부했던 학생. 민주주의 수업에선 자발적인 영구 과락.

그의 영혼은 늘 같은 과목만 공부했지. 하지만 몸이 가장

오래 암기한 건 고문의 기억. (…)

 

                                         밀랍같이 흰 내머리에. 정치가

, 법관이여, , 확신범의 힘센 형제자매들이여. 기다려

다오. 불탄 노래가 자라나 더 매끄러운 머리채를 늘어뜨

릴 때까지.

 

불에 덴 상처로 대머리가 된 라푼젤은 아무도 오지 않는 탑 속에서 그를 기다리며 부서진 나선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온다고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무한의 펜슬로 씁니다. 라푼젤은 오지 않을 K를 기다립니다. (라푼젤, K를 기다리다)

 

시인의 무기력은 절망한 라푼젤을 확인한 후 신에게로 향합니다.

 

모르는 고장의 동맥이 또 끊어진 것 같다

쏟아지는 피에 거구의 여신이 드레스를 깨끗이 빨고

있는 것 같다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종이는 손수건 도무지 손바닥만 한 평화

종이는 신의 얼굴 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의 얼굴

삼류 신, 어린 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신이다 (빨간네잎클러버 들판)

 

별들을 지키는 신이 있길 기도합니다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예은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했다며 엄마에게 미안한 예은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노릇노릇 익어가는 삶을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한 예은

제가 있는 곳엔 친구들도 있고, 목소리가 곱고,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빛난다고 칭찬하는 국어 선생님이 계신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예은이

언니에게 감사를 전하는 예은이

자기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뜬 무지개 같은 아이라며 고마움을 전하는 예은이

(그날 이후)

 

  시는 글로 그리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차가운 현실에 저항하면서도 사랑으로 위로하는 아름다운 편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44월의 아픔이 생생하게 기억나면서 못난 어른이라는 자책과 함께 상처가 치유되길 기도하는 간절함이 아직도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에 절망합니다절망의 아교풀로 붙인 하늘의 별이 눈물에 녹는 일이 없도록 별이 창조되는 창세기가 이 땅에 시현되길 기도합니다. 이태원의 밤하늘에도 간신히 붙인 별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위로의 시가 전달되길 기도합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