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핵위기와 북미 제네바 합의(1993~1994)
한반도에서는 북한과의 관계가 상수입니다. 한반도의 남북을 반분하여 전혀 성격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서 서로 경쟁하고 대치하고 때로는 대화하면서 공존을 갈망하고 나아가 통일을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만 마음이 맞다고 만나고 대화하고 협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끼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도 어렵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국들이 한반도에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개 필부라고 해도 노랫말처럼 브르며 공감하고 주변국의 이익에 놀아나지 않도록 일찍이 경고를 했습니다. “미국 놈 믿지 마라. 소련 놈 속지 마라. 일본 놈 일어난다. 뙈 놈 되돌아온다. 조선 놈들아 조심해라” 남문희 대기자의 1993년에 쓴 기사를 보면서 지금과는 달리 정책이 만들어지고 이견이 조정된다는 상식을 보았습니다. 어쩌다 우리는 지금의 형국이 되었는지 안타깝습니다. 내용을 풀어보겠습니다.
91년 10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최고 권력 실세인 등소평이 핵 개발을 말리면서 차라리 미국에 경수로 발전소를 지어 달라고 요구하라고 권유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답니다. 남 대기자는 당시 정부 고위당국자 중 한 분을 통하여 북한이 핵 개발 대신 경수로를 협상 카드로 제시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91년에 주고받은 적이 있었는데, 93년 6월 뉴욕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 회담 직후 2년 전에는 소설처럼 아득해 보였던 얘기가 현실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북한 대표로부터 이런 제안이 나왔다는 소식은 그동안 극소수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소문으로만 은밀하게 떠돌았는데, 실제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할 당시 외무부 담당 실무자는 “북미 회담 내용은 현재로서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확인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취재 내용은 정확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임을 간접 시인했다고 합니다.
외무부 담당 실무자는 “비현실적인 제안이다”라고 말했지만 반면 통일원이나 다수의 핵 공학자들은 앞으로 북미 회담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경우 결국에는 경수로원자로 기술 이전 문제가 실질적인 논의의 핵심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정부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북미 간의 대화와 관련하여 당시 김영삼 정부는 한국이 배제된 채 진행된 북미 간 합의에 대해 반발하면서 남북관계 개선 없이 북미관계의 개선만 이뤄지는 상황은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93년 7월 19일의 북미 2단계 고위급 회담 합의는 곧바로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다 93년 12월 29일 북미 접촉에서 극적인 돌파구가 열립니다. 남문희 대기자의 1994년 3월 3일 자 기사는 김영삼 “정부 대북정책 부드러워진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관계자의 말을 전합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후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온건론과 강경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올해 들어서는 더 이상 남북관계에 긴장이 지속돼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 정치적인 요인도 남 대기자는 설명합니다. “특히 올해 국정운영의 최대 목표가 경제 회생 및 국제 경쟁력 확보라는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핵문제로 인해 남북관계가 더 이상 악화하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이후 가뜩이나 어려워진 경제사정이 악화돼 정부의 국제 경쟁력 확보 노력이 무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몇 차례 위기 국면을 겪으면서 그동안의 강경책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위기만 심화시켰던 데 대한 자체 반성도 제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의 통일정책에 깊이 관여하는 한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주최하는 각종 대책회의에 참여해 보면 그동안 강경했던 인사들의 입장이 상당히 완화된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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