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면 다른 생각
우리 아파트 단지 뒤로는 초등학생들이 이용하는 통학로가 있습니다. 자그만 동산을 등지고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어 단지 뒤로 언덕길을 올라가는 길입니다. 입주 초기 아이들이 옆 단지와 연결된 문을 통과하여 다녔는데, 옆 단지 주민들이 문을 폐쇄하는 바람에 옆 단지 위의 중학교에서 부지를 제공하여 데크 플레이트를 깔고 통학로를 개설했습니다. 우리 단지의 뒤 언덕길을 올라 중학교가 제공한 데크 길은 옆 단지를 아래로 조망하며 100미터 남짓의 길인데 통학시간 외에는 호젓합니다.
길이 만들어지고 23년이 지났습니다. 철망을 설치할 때 학교 운동장 가로 심었던 조경수들이 많이 자랐습니다. 처음 철망과 떨어져 자라던 나무들이 철망의 마름모꼴 공간으로 가지를 내밀었고, 철망은 나무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철망은 뒤틀리고 나무 가지 사이로 파고들었습니다. 저녁 운동 삼아 산책을 할 때면 늘 이 나무와 철망이 불편했습니다. 가지를 파고드는 철망에 나무가 아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아픈 가지를 잘라줘야 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오늘 시사인에 실린 안희제 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에 깜놀했습니다.
“철망을 타고 가지를 뻗어내는 나무들이 철망과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 나무는 그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었다. 그것은 철망을 끊어내려는 듯했다.” 안 작가는 철망이 나무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철망을 공격하여 철망이 변형되고, 끊어질 것처럼 보았습니다. 나무와 철망에 얽힌 안 작가의 생각은 이어집니다.
“나무와 철망 사이의 아주 오래되고 고요한 힘 겨루기를 보고 있으면 자연이 문명의 내부인지 외부인지 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질문이 잘못된 것같이 생각된다. 내부와 외부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어쩌다 맞닿고 밀어내고 휘어지고 뻗으며 자라나는 서로가 있을 뿐이다.” 자연물인 나무와 인공물인 철망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생각이지요? 자연물인 나무에게 공격적인 인공물 철망을 본 저와는 다른 생각입니다. 안 작가의 글 말미를 보시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하필 그곳에서 그 방향으로 자란 나무와 철망의 만남으로, 비로소 무언가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장면이 만들어지는 것만 같다. 자연과 문명의 울타리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이쯤 되면 지구에서 0.1도 어긋나 출발한 나의 생각이 달을 비껴 우주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인공물인 철망을 설치할 때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가지치기를 하여 철망 사이에서 고통받는 나무가 없도록 미리 관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고, 지금이라도 철망과 얽힌 가지를 잘라 나무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나무와 철망이 서로 공존할 수 있도록 사람이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자연과 문명이 부딪히면서 자연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으로 읽은 안 작가의 생각은 단 1도 하지 않았습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다”는 말과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다”는 말 중 어느 말이 맞을까요? 두 말 다 맞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들은 것 같은데, 앞에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고, 뒤에 말은 생존자의 자기변명입니다. 진화론에서는 “생존에 유리한 것은 종의 다양성”입니다. 같은 장면을 보고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는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안 작가의 글을 읽고 든 생각입니다.
같은 장면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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