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참아야 하는 사람. 많이 참았던 사람. 그래서 많이 아픈 사람. 혹시라도 조금 편해지나 싶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도 미안해하는 사람. 자식에게는 한없이 지기만 하는 사람. 우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어머니도 요즘은 많이 소환됩니다. 아이를 아프게 하는 사람. 남편을 외롭게 하는 사람. 자기만 아는 사람. 정 반대의 어머니가 소환되는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세상 어떤 사람도 한편으로만 편향된 그런 캐릭터를 가지지는 않잖아요? 여기 어디 중간쯤에 제가 아는 어머니, 그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어머니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숙 씨와 춘영 씨의 딸로 태어난 반희 씨는 두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다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핑계로 두 사람에게서 도망칩니다. 춘영 씨와 정숙 씨는 반희 씨가 이기적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줄줄이 딸린 동생을 키우고 가라고 요구합니다. 반희 씨는 도망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받힌다고 하지요? 결혼 생활이 힘들어 도망을 또 칩니다. 춘영 씨와 정숙 씨는 반희 씨의 이혼을 반대합니다. 돈 잘 버는 남편에 똑똑한 아들내미 내팽개치고 이혼하는 것은 복에 겨워서, 호강에 받혀서 그런다고 합니다. 춘영 씨와 정숙 씨는 외손녀 채운 씨가 안중에도 없습니다. 남편 병석 씨와 오빠 명운 씨와 같이 사는 채운 씨는 불운하게 두 번을 도망친 엄마와 여행을 떠납니다. 짧은 1박 2일의 여행동안 두 사람은 먹고, 마시고, 대화를 하면서 서로를 이해합니다. 엄마와 딸은 항상 이렇게 화해를 하는 걸까요? 이것도 아니라며 요즘 소환되는 얘기도 다양합니다만 권여선의 소설에서는 둘이 힘을 얻어 여행지에서 떠나, 채운을 떠난 후 한 번도 불러준 적 없는 반희 씨의 집으로 향합니다.
채운은 가슴에 통증을 안고 삽니다. 아픈 사랑 때문입니다. 채운의 말입니다.
“알아. 엄마 보면 날 사랑하는 거 맞아. 날 사랑해서 힘든 게 보여, 나도 엄마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 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이런 사랑을 하냐고.”
채운을 보며 반희 씨는 생각에 잠깁니다.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 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 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 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 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 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반희 씨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러면서 작게 소리 내어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채운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사랑을 하면 아프다는 얘기가 실감이 납니다. 전에는 몰랐습니다. 온갖 경험으로 산전수전 다 겪고나서 보니 사랑 이거 아프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될 일을 ‘사랑하지 않기’를 못하는 ‘실버들 천만사’가 얽힌 그런 사람과의 아픈 사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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