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사회평론 간행 4.

무주이장 2022. 12. 30. 12:25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단테 신곡에서 소개하는 지옥을 그림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조그만 암자에서 낮잠을 자고는 일어나 벽에 붙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도를 본 적도 있습니다. 신곡의 지옥도가 먼저 그려졌을 것이니 암자에 있던 지옥도가 신곡의 지옥도를 참조해서 그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테가 말한 지옥도를 보면서 신선함을 따로 느끼지 못한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제가 본 지옥도 때문일 것 같습니다. 거짓말을 한 자의 혀를 길게 뽑는 벌, 뜨거운 솥에서 삶아지는 중생, 불에 타는 사람, 맷돌에 갈려 가루가 되는 인간 등등을 눈이 튀어나올 듯한 나한들이 집행을 하는 그림으로 기억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은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이름으로 죽고 나서 가야 할 다른 곳이 있다고,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저자는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고 하여도, 천국과 지옥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곳은 아니기에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소개합니다.

난 지옥을 아주 잘 알아요. …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가까운 사람을 잃어본 저는 소설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림에서 본 지옥에 가지 않아도 상실감이 지옥이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지옥 같은 마음 상태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를 저자는 소개합니다. 장자는 인생이 봄이라면, 봄이 갔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인생은 그저 순환하는 에너지 흐름의 일부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영국 작가 조지 기싱은 삶과 죽음이란 인간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으로, 인간을 초월한 큰 운명의 힘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인생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살다 죽었다고 한들 그에 대해 수긍할 것도 거역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관점에 겸허한 태도로 순응하는 데도 시야를 확장할 수 있는 각별한 마음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슬픔에 지친 나머지 그러한 마음의 힘을 낼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자는 죽음의 기억이 자신을 압도할 때, 무의미와 슬픔이 파도처럼 들이닥칠 때, 절벽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덕을 오르는 중이라고 상상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시인 안희연을 소개합니다. “슬픈 사람은 절벽이나 수렁을 상상할 뿐, 언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절벽과 달리 언덕은 그 위에 시원한 바람을 이고 있다. 그리하여 언덕에 힘들여 오른다는 것은 그 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절망하지 않고 다시 언덕을 내려올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분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아는 분 같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