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것이 삶의 레시피다
회사를 운영하든, 나라를 운영하든 높은 자리에서 지시하고 명령하고 감독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말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 입은 닫고 주머니는 여는 신중한 분들을 간혹 모래에서 금을 찾듯 희귀하게 찾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말이 많지요. 말이 많은 것은 들어주기만 하고 들은 대로 행동하는 척만 하면 되지만 말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당황스럽고 황당한 상황이 일어납니다. 청지기로 유명한 분들은 모시는 분들의 모호한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탁월한 경우가 많지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청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청지기도 권력이 생기면 아래 것들에게 말이 많아지고, 배운 게 그것뿐이라 말도 구체성을 잃습니다.
“권력자의 말이 선명하면 겁을 내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하게끔 말을 흐려야 해요.” 이런 생활철학을 가진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더욱 문제는 틀린 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틀린 말을 따라 하면 그 결과도 틀리게 됩니다. 틀린 말을 바른 행동으로 교정하면 그 과정이 괴롭습니다. 시킨 대로 하지 않는다고 꾸중을 듣는 것은 자아를 파괴하여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특정하는 자아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간 쓸개 다 빼놓고 사는 우수한 역량의 청지기도 자기의 자아를 지키는 심지는 분명히 있지 않을까요?. 이것을 건드리면 청지기도 무너집니다. 틀린 말을 따라 틀린 행동을 하면서 틀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부담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과정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인생이 가뜩이나 허무하다는데 자신을 부정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자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를 소개하면서 천천히 보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사태의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천히 보아야 한다. 천천히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음미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내어 피터 허턴이나 켈리 라이카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일은 현란한 이미지의 야단법석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다. 끝없이 독촉해대는 생활의 속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구체성을 무시한 난폭한 일반화에 저항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란한 연말의 시간을 통과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은 신산한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시피이기도 하다.”
공무원을 찾아가서 자신의 민원이 해결되지 않았다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나 있어?”
공무원이 물었습니다.
“누구신대요?”
그가 뻐기듯 말했습니다.
“나 네티즌이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지금은 국민으로 사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할 말들로 공무원들이 국민을 잡도리합니다. 누구는 나라를 좀먹는 부패세력이라고 하고, 누구는 북한핵 같은 놈이라고 하고, 걸핏하면 압수수색에 구속영장을 쳐 댑니다. 이런 신산한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시피를 저자는 알려줍니다.
“서둘러 판단 마시고, 집요하게 응시하시고, 천천히 구체적으로 음미하세요.”
이분 절대로 허무한 공상가가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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