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자리에 앙상한 ‘법치’만 전혜원 기자.
기자의 문제 제기
대통령은 업무개시명령을 의결한 뒤 “노사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법치란 법의 지배를 말하는 것인데 누구도 법에 의하지 않으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럼 업무개시명령은 민주주의 원리가 구현된 법인가?
“법의 형식을 갖춘 제도이지만 위헌성이 상당하다. ‘정당한 사유 없이’ ‘커다란 지장’ ‘매우 심각한 위기’처럼 추상적인 표현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위반하면 형사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노사 법치주의’라는 말은 어색하다. 노사관계에서는 ‘자치’라는 말을 더 많이 쓰며 그 핵심은 대화와 협상이다. 대통령이 준법과 법치주의를 헷갈리는 것 같다.”(박귀천 교수) (기자의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윤석열식 법치주의의 핵심 키워드에 도달했다. 그가 주문하는 것은 내용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에서의 법치주의라기보다는 ‘준법’인데, 그 적용은 퍽 자의적이다. 화물차 기사들이 운전대를 놓은 행위가 ‘정당한 사유가 없다’고 선언적으로 판단했고 노동조합이 아니라면서 업무복귀명령을 했는데, 그 근거조항은 위헌성이 있다(2004년 만들어진 이후 한 번도 발동된 적 없는 명령이다).
정부가 단순한 의견조회에 불과하다고 한 국제노동기구의 공문은 “업무복귀명령이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간주”했다.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헌법 제6조 1항) 헌법과 국제규범 위반을 감수하면서 이런 조치를 한 이유로 대통령이 든 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다. 이 말은 한국 노동시장이 대기업.정규직으로 대표되는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뉘어 있고 그 격차도 극심함을 뜻한다. 그런데 화물연대 기사들이 과연 1차 노동시장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특수고용직이다. 물론 화물연대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어 여타의 2차 노동시장에 있는 이들보다는 처지가 낫다. 이때 국가가 할 일은 조직된 이들을 비난하는 것인가? 실은 화물연대야말로 2차 노동시장에서 그나마 기존 노동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가격 결정 매커니즘(안전운임제)을 요구하고 발전시켜온 주체다. 이들의 요구를 불법으로 낙인찍는다면, 자칫 노동법 테두리에서 벗어난 하층은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을 두고 참모들과의 비공개회의에서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화물운송 시장의 구조적 문제는 시장에 맡겨서 해결될 성격이라 보기 어렵다. 이들의 사업장이 민간인이 다니는 도로란 점에서 일반 사업장과도 다르다. 산업이 파멸로 향해 가고 있고 이를 해결하려면 정치력이 필요한데, 정부가 이런 산업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는 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정부가 문제를 풀 생각이 없는 것을 넘어서 ‘풀어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앙상한 준법의 실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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