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저주 토끼. 정보라 지음. 아작 간행 3.

무주이장 2022. 10. 18. 16:56

 

 어린 시절, 시골 할아버지 집으로 방학이 되면 갔습니다. 시골에 가는 길에는 아버지가 동생과 저를 데리고 동행을 하셨고, 저녁 해거름이면 버스를 타러 정거장으로 향하는 마을 내리막길을 동생의 손을 잡고 가셨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뒤에서 물끄러미 보면서 몸을 파고드는 외로움 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이 어째서 외로움인지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왜 나만 두고 가셨을까? 나중에야 어머니를 통해 사정을 알았습니다. 단칸방에서 살던 그때, 아버지는 박봉의 문관 생활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득에 물에 넣으면 스르륵 녹아버릴 정도의 미약한 힘을 더 보태기 위해 낮밤으로 일을 하셨으니, 아들 둘을 다 근사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학교를 쉬는 방학이면 세 살 더 많은 저를 할머니에게 맡겼습니다. 그 당시 이미 풍이 들어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셨던 할아버지를 데리고 있었던 할머니에게 저도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풍이 든 것은 집안의 내력도 없지 않았겠지만, 젊은 시절부터 투전판에서 무릎의 피를 말리며 몇 날 며칠 낮과 밤을 지새우기를 습관 들여 살던 때문이 아닌지 의심을 합니다. 어린 제가 그 시절, 벌써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철이 들고 할머니의 곤궁한 삶을 들어줄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백내장이라며 눈도 희미하게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것인지 방에 누워서 자주 할머니를 부르곤 했습니다. 매일 누워 지내는 통에 다리에 힘이 더욱 떨어져 갈 때쯤 어린 저에게 부축을 하게 하고는 마을길을 걷기도 했지만 정한 코스를 반도 다 돌기 전에 힘드시다고 하며 엎어 달라고 하던 할아버지였습니다.

 

 비록 지붕은 기와였지만 마루로 연결된 두 칸의 작은 방은 옹색했지요. 두 방을 가로지른 벽의 가운데 위에 조그만 구멍을 내고는 30촉 전구를 달아 두 방을 어둡게 비추었습니다. 방을 가로지른 벽이 두꺼워 30촉 전구가 내는 빛의 아래는 그림자가 졌고 옆으로 비친 빛은 아래를 비추기에는 힘이 부쳐 간신히 천장과 벽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벽에는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신문지를 붙인 벽은 지나간 사건 사고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밤새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재미를 붙인 이야기가 이어지려고 하면 자자. 불 꺼라.”는 할아버지의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려받은 것 없이 결혼을 해서 자포자기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심성이 게으르고 무책임해서 그런 것인지 저는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가진 뿌리 깊은 미움과 원망을 가지게 한 사건은 결혼식 당일부터였습니다. 결혼이 무에 그리 즐거운 것이라고 결혼을 할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한 듯합니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정한 결혼을 거부할 용기도 없었던 할아버지였겠지요. 결혼식을 하려고 젊은 새색시가 집 마당에서 준비를 하는데, 신랑이 안 보였다고 합니다. 모두가 신랑을 찾느라 부산한데, 누가 그러더랍니다. “저기 봉놋방에 가봐.”  밤새 노름질을 하던 할아버지가 거기서 자고 있었고 급히 깨워서 데려왔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공포가 가득했던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할아버지가 30촉 전등이 흔들리면 덩달아 빛이 흔들리던 밤에 어린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오늘 읽은 정보라 작가의 이 주는 분위기와 비슷한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의 욕심, 욕망이 만든 습관이 부르는 무섭고도 슬픈 절망적인 이야기. 끝없이 이어지는 원형의 전설 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작가가 에서 얘기한 이야기보다는 재미없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끌어들이며 구겨지고 찢어지고 때가 타고 씻어내며 이어지는 이야기 말입니다. 여우는 그런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지요. 구미호, 매구라고 하지요. 작가의 은 어린 시절 보고 듣고 느꼈던 분위기를 불현듯 기억나게 하는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