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카렌 암스트롱, 신의 전쟁(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정영목 옮김. 교양인 간행 3.

무주이장 2022. 9. 21. 15:04

폭력과 평화 사이, 히브리인의 딜레마(책의 14장의 제목임)

 

이스라엘인은 유일신 교도가 아니었다.

 모세가 죽은 뒤 약속한 땅을 정복하는 일은 여호수아에게 맡겨졌습니다. 성경의 여호수아에는 여전히 고대의 자료가 일부 남아 있지만 앞서 말한 개혁가들이 이것 또한 근본적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묘하게 외국인 혐오적인 자신들의 신학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개혁가들은 여호수아가 야훼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여 가나안의 모든 주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도시를 파괴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대대적인 파괴의 고고학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성경의 텍스트 자체도 이스라엘인이 가나안인과 수백 년 동안 공존하며 서로 혼인했다는 것, 또 그 땅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가나안인 수중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사사기 3:1-6절, 에스라 9:1-2절 참조)

 

 이스라엘인은 대안적 사회를 만들라는 명령에 충실하여 처음에는 다른 나라들과 같은일반 국가를 만드는 것을 꺼리고 중앙 정부 없이 독립적인 족장들의 구역을 이루어 살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웃의 공격을 받으면 지도자, 즉 판관(사사)이 나서서 전 주민을 동원하여 공격에 맞섭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강력한 지배 체제가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인은 도덕적 부패에 빠져들었고, 비록 자유는 얻었지만 영혼은 잃은 듯 보였으며, 군주제가 질서를 회복할 유일한 수단인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장로들은 판관 사무엘에게 충격적인 요청을 합니다.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사무엘상 8:5절 참조) 사무엘은 그 대답으로 농경 국가의 억압에 대한 주목할 만한 비판을 내놓는데, 여기에는 근대 이전 모든 문명의 일반적인 착취가 나열되어 있습니다.(사무엘상 8:11-18절 참조)

 

 비록 내키지 않았으나 결국 이런 체제를 승인한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체제의 구조적 폭력을 완전히 거부했지만 실행 가능한 대안을 수립하지는 못했지요. 이스라엘인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꿈에도 불구하고 강한 국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발견했을 뿐입니다.

 

유일신 신앙을 창조한 위기의 시대

  므나쎄의 손자인 요시야(요시아, 기원전 640-609)의 치세에는 예언자 사제 서기 집단이 광범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기원전 622년 요시야는 유다의 황금시대의 상징인 솔로몬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성전에서 건축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개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대사제는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열왕기하 22:8절 참조) 개혁가들은 그들이 발견한 두루마리가 모세에게 야훼가 직접 구술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야훼가 배타적 헌신을 요구했다고 처음으로 주장합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인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강하게 금지했을 뿐 아니라 약속된 땅의 토착 민족들을 쓸어내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신명기 7:2-5절 참조)

 

 "이스라엘인은 모세가 기록한 이 두 번째 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간 야훼의 명령을 무시해 왔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서하고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고 그들과 조약을 맺었다. 야훼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에 진노를 발하신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혁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세는 이스라엘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경고했다는 것입니다(신명기 28: 64, 67, 열왕기하 22:11-13절 참조) 요시야는 세페르 토라(법전) 덕분에 완전한 확신을 품고 즉시 폭력적인 파괴 잔치를 벌여 므나쎄가 들여온 제례 용품을 없애고 바알과 아세라 상을 불태우고 시골의 신당을 철폐하고 신성한 남창의 집을 부수고 아시라아의 말을 죽였습니다. 이런 광적인 공격은 새롭고 비극적인 전개로, 성전 제례와 이스라엘인의 개인적 신앙생활 양쪽에서 이루던 신성한 상징을 다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로운 일이어서 개혁가들은 이런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 그대로 역사를 새로 써야만 했습니다. 공격적인 신학은 히브리 성경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유일신교의 뿌리 깊은 공격성과 불관용을 증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수많은 글은 이 개혁가들이 쓰거나 고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저자들의 개혁은 결코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요시야의 독립 노력은 그가 기원전 609년 파라오 네코(느고)와 작은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는 바람에 끝나고 말았고 새로운 바빌론 제국이 아시리아를 대체하며 중동의 통제권을 놓고 이집트와 경쟁했습니다. 유다는 몇 년 동안 이 강대국들을 요리조리 피했으나 결국 기원전 597년 봉기 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살)는 유다의 귀족, 군인, 숙련된 장인 8천 명을 살던 땅에서 추방했습니다. 10년 뒤 네부카드네자르는 성전을 부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했으며, 유다인 5천 명을 더 추방하여 폐허가 된 땅에는 하층 계급만 남게 되었습니다. 유다 추방자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상당히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그러나 추방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없었고 일부는 심지어 강제 노역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야훼가 백성을 다시 해방시킬 것 같았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예언자가 탈출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이 주도하게 됩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