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오늘묵상

QT: 책 읽기, 성서, 존 리치스 지음,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019

무주이장 2022. 1. 5. 12:53

QT: 책 읽기, '성서' 존 리치스 지음,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019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온화한 얼굴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비록 지상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며 희로애락에 빠져 있는 우리 모습으로 오신 분이지만 그렇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다가 예수님이 성전의 상인들을 쫓아내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신도들이 신전에 바치려는 제물과 재산은 거룩하지 않아 바칠 수 없다는 엉뚱한 율법의 보호 속에 성전에서 전을 펼친 상인들은 신도들이 가져온 제물과 화폐 대신 자기들이 파는 제물과 화폐로 바꿔야 한다고 하여 폭리를 취했습니다. 물어보나 마나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상납을 했겠지요. 성전 내 상인들을 예수님은 쫓아내신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나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비롯하여 모든 짐승을 성전 뜰에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그 사람들의 돈을 흩트리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시장터로 만들지 마라!(요한복음 2:15-16, 아가페 쉬운 성경)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사고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책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자리를 뒤엎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누구도 물건을 가지고 성전의 뜰을 가로질러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바꾸었다.(마가복음 11:15-17, 아가페 쉬운 성경)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동일한 사건을 표현한 내용임에도 뉘앙스나 분위기가 뭔가 차이가 납니다. 뭐라고 설명을 하기에 아는 것이 없었는데 성전 소동에 대한 그림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교회 벽면에 그려진 예수의 생애 그림들 중에서 성전 소동을 보면 예수님이 잔뜩 화가 나신 모습으로 성전 상인들을 향해 두 손을 주먹 쥐고 때리려고 하십니다. 상인들의 주눅 든 얼굴은 예수님의 성낸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상인이 파는 양도 놀라 달아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전 소동그림에서는 예수님이 채찍을 들고 상인들을 쫓아내는 모습이지만, 조토 디 본도네는 예수님의 분노를 두 주먹으로 표현한 것이 독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벌을 주는 수단인 채찍이 아니라, 두 주먹으로 시정잡배들처럼 싸우는 모습에서 지상의 인간 모습 예수님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화가 조토 디 본도네의 해석을 용인할까요?

 

 성서의 저자 존 리치스는 성경의 다양한 해석은 성경이 한 사람에 의해 쓰인 것도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이 구술한 내용들을 문자로 기록하였고, 이들 많은 성서들을 여러 사람이 또한 엮었다는 점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듯합니다. 성서의 출생이 이러한데,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성령이 기록하였다는 말씀은 사실이 아닌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사실과 믿음이 별개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마르틴 루터의 도전이 있기 전 중세는 성서 해석을 교회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거의 통합시켰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성서 속 모든 이야기가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세계사를 이룬다는 관점에서 성서를 읽었다는 것이지요. 반면, 루터는 성서의 문법적 의미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징벌이라는 위압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해 말하는 책으로 바꾸었습니다. 루터는 지배적 성서 이해에 대한 비판을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만 제기했지만, 르네상스는 교회 외부에서 비판을 가해 왔습니다. 지리적 발견으로 성서 세계관의 지리적 한계가 드러났고, 역사적 학문들이 성장하여 성서의 역사관이 포괄적인 역사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성서에 기반한 세상을 보는 시각은 사실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서가 규범적 역할이나 형성적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 텍스트의 기능으로만 제한되지는 않았지요. 지금도 우리는 성경 속 이야기의 교훈을 배우고 있으니까요.

 

 식민지 치하에서 압제를 견뎌야 했던 중미에서는 해방신학으로 성경이 읽혔고, 식민지를 개척했던 자들은 성경을 들고 전도를 핑계로 식민지를 수탈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헤이트 정책을 성경은 두둔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 이런 기능을 성경이 하는 것은 성경 구절의 일반성과 모호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것은 성경 구절을 특수하고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제 마음껏 성경을 가지고 말장난을 할까요? 말장난을 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저자는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권합니다. 성서는 사상, 문학, 예술의 위대한 기념비에 영감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도를 넘어선 최악의 만행, 이기심, 편협성을 부채질하기도 했기에 우리는 성경을 분별하여 읽으라는 말이겠지요. 성직자들은 신성한 글을 정경화 하는 것으로 종교적 탈선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는 너무나 허술한 방법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동일한 정경을 인정하는 신도 교회들의 엄청난 다양성이 그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고 하면서 어떤 공동체 내에서 성서 해석의 정합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려면 정경화 이상의 전략이 필요한 것이라며 몇 가지의 방법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미 성서의 해석에 관한 성직자의 독점권이 깨진 이상 이제 모든 남녀가 성서해석자가 될 수 있음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든 독자들은 결국 서로 다른 해석들 사이에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하며, 그때 어느 정도는 독자들 자신의 도덕적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물려받은 가치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담긴 상이한 목소리들,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상이한 방식들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감에 따라 그들의 도덕적, 종교적 상상과 판단은 견실해지고 날카로워진다고 독려합니다.

 

 결국 분별 있고 세심한 독법이 생겨난 곳에서만 성경의 공동 전승이 양분을 공급받아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며 성서의 어두운 면을 경계하면서도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잠재력을 의식하는, 분별력을 갖춘 독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에 대한 다양성보다는 내가 속한 교단의 교리에만 함몰하는 것에 조금 더 주의하며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더욱 힘을 주게 되었습니다.

예스24에서 산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