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소개 받은 책, 최영미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친구의 에세이 글

무주이장 2021. 11. 18. 09:14

저는 시집을 읽으려고 노력해도 잘 못 읽습니다. 쉽게 다가오지 않는 시어들에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쉽게 읽으며 감동받은 시집으로는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과 원태연의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정도입니다. 좋아한 시는 윤동주의 서시, 박목월의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 표현된 시(나그네)입니다. 대충 어떤 시어를 좋아하는지 아실 듯하지요. 그런데 친구가 보낸 카톡에서 시집을 소개받았습니다. 책을 소개하려는 글이 아니라, 시집을 읽은 감상을 적은 소감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블로그로 옮겨왔습니다. 동의는 나중에 받으려고 합니다. 허락할 겁니다.

 

<남경우 FC의 에세이 - 詩文章(21)>

 

 

詩 읽기를 생활로 하다시피 하는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최영미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시집을 읽으며 이렇게 마음이 심란할 때가 없었던 것 같다. 生의 밑바닥을 샅샅이 훑는 시인의 詩眼에 순식간에 끌려들어 간다.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그리고 간병, 위선과의 재판, 아픔의 연속... 이처럼 끌려들 수 있을까 싶다.

 

특히 우리 사회를 통째로 흔들었던 미투 Me too관련 詩作은 문단의 성폭력적 세태를 짐작하게 했고 시인의 용기에 놀랐다.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p11<밥을 지으며>

 

대충 사는 것이 힘들었다는 표현이 내 마음에 닿는다. 지금 내 인생이 그렇다. 대충대충 그것도 심심하기 이럴 때 없는 삶이다. 남들은 편하게 살라고 대충 하라고 하는데 시인처럼 나는 왜 이리 힘이 들까!

 

"가끔 물만 주면 돼 / , 에 힘을 주며 그는 푸른 웃음을 뿌렸다 ...첫 눈이 오기 전에 나는 그를 버렸다...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난초 화분 옆에서...그가 말했다 / 얘네들이 더 잘 알아 /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먼저 버린 건, 당신 아니었나?"

p12<꽃들이 먼저 알아>

 

젊은 남녀가 에로틱함을 넘어 하나 되기 힘든 상황이 그려진 것으로 읽었다. 난초 화분을 두고 물 주는 것에 관심이 있는 남자와 소설을 쓰는데 몰입하는 여자, 두 사람의 파국이 시든 난초를 두고 네 탓 내 탓한다.

 

"네가 나의 마지막 여름 장미였지...침대가 작다고 투덜대는 내게 / 너는 속삭였지 / 사랑하면 칼날 위에서도 잘 수 있어"

p14<마지막 여름 장미>

 

뜨거운 여름과 고혹적인 장미가 마지막 여름을 달군다. 시의 여운은 에로틱보다는 허망함이 묻어 있다. 한 때 그랬지 하는!

 

"개나리가 피려면 / 따뜻한 하루면 충분한데 / 내게도 봄이 올까?

" p18<오래된>

 

추위가 풀리나 싶을 때 어느새 핀 개나리를 보며 고단한 삶에도 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따뜻한 하루면 충분하다는 시인의 말에 많은 독자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나도 물론이지만.

 

"시인을 그냥 내버려둬 / 혼자 울게 내버려둬 / 가난이 지겹다 투덜거려도 / 달을 쳐다보며 낭만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 ...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 / 제발 그냥 내버려둬" p21 <내버려둬>

 

詩는 生의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물음을 갖게 한다. 불안과 평온,  이 중에서는 어디서 나오는가? 물론 어디서든 나온다는 것이 답일 테지만 나는 生의 野生에서 나오는 詩에 더 많은 애정을 갖는다. 불안한 시인에게 가하는 충고는 테러에 가깝다. 그의 삶이 곧 詩라 믿고 지켜볼 일이다. 내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위로받고 싶을 때만 / 누군가를 찾아가 / 위로하는 척 했다"

p33 <예정에 없던 음주>

 

술을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한잔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해서이다. 그의 말을 듣고만 있어도 나의 감정이 정리가 된다. 위로하는 척 위로를 받는다.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비평가 한마디에 죽고 사는 / 내가 정말 썩을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p34 <등단 소감>

 

문단의 풍토를 정면으로 가격한 詩여서 한 동안 시집에 수록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인의 강직한 성격과 반항 정신을 드러낸 작품이다. 등단의 기쁨을 문단의 세태를 고발하는 격문을 쓴 셈이다. 이 詩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문단의 퇴폐적 환경이 급속히 바뀌었을 것이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이 교활한 늙은이야" / 감히 30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p36<괴물>

 

누구나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詩評을 주무르는 절대 권력에게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리라. 시인은 밥상을 뒤엎고 나왔다. '맥주병이 날아올 듯' 뒤통수가 근질했겠지. 이 사건으로 詩 業界는 난리가 났을 것이라.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고소도 당하고... 일격을 당한 괴물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 것인가.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 /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무슨 상을 받지 않았지만...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 우상을 숭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썩은 계란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 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

p43<바위로 계란 깨기>

 

노털상의 후보로 거론된다고 한들 시인에게는 한낱 썩은 계란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바위가 아니다. 내가 바위다. 그러니 바위가 썩은 계란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에서 보낸 소장을 받고...한 편의 짧은 시를 쓰고 / 100쪽의 글을 읽어야 하다니...독이 묻은 종이를 읽고 싶지 않아 ...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p44<독이 묻은 종이>

 

시인의 반항에 기득 세력들이 반성과 회개는커녕 재판을 걸어온 모양이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그냥 장난 삼아 스쳤을 뿐이라고 했겠지. 소장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시인의 편을 드는 나도 그렇지만 詩 한 편에 백 장의 A4지로 공격을 해 온 그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고 용서가 안 된다. 흥분되는 새벽.

 

"내가 아니라 우리 / 너가 아니라 우리 / 싫어도 우리, 라고 말하자 ... 우리가 쓸고 닦고 먹여 살린 세상에서...우리가 먹이고 씻기고 재워준 그들이...어머니라는 / 아내라는 / 노예 혹은 인형이 되어...

여성의 이름으로 우리 역사를 써야겠다...두려움을 넘어 / 내가 우리가 되는 기적" p48<여성의 이름으로>

 

세상의 절반이 여성임에도 구별이 많았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역사처럼 굳어진 남성의 DNA가 단박에 바뀌기 어렵다. 더구나 스스로 변하길 기대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같다. 詩文壇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처럼 시인의 용기가 돋보인다.

 

"깊은 곳을 본 사람, 이라고 / 길가메시 서사시는 시작한다... 지혜로운 성인이 아니라 / 깊은 곳을 본 사람이 왕국을 다스렸다 ...존재하지 않는 깊이로 표현하려는 / 욕망에서 詩가 탄생했다" p62<깊은 곳을 본 사람 He who saw the Deep>

 

깊은 곳을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뜻일까? 마음으로 세상사를 꿰뚫어 본다는 것일까? 詩가 그렇게 태동했다고 하니 길가메시는 詩人이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아는 똥은 더럽지 않다 / 내가 모르는 똥은 더러워...열흘 만에 구경한 내 어미의 똥은 사랑스러워..."p67<간병일기>

 

'간병'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사람들은 질겁을 한다. 그만큼 간병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힘들다는 뜻이다. 간병을 하다 보면 사랑이 미움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서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한다. 엄마를 간호하는 딸이 쓴 詩에 마음이 아린다.

 

"인생은 낙원이에요...아낌없이 주는 나무 밑에서 낙엽을 줍던 소녀에게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기고...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쓴다...인생은 낙원이야 /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 p74<낙원>

 

나에게도 스물이 있었고 삼십이 있었고 오십이 있었다. 점점 더 커지는 듯한 고개를 넘어오는 동안 지친 표정이 역력해졌다. 앉아도 아프고 일어서도 곡소리가 난다. 도처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낙원에 산다고는 못하지만 지옥은 아니다. ㅎㅎ

 

"초록에 굶주린 몸이 도서관을 나온다...시 따위는 읽고 쓰지 않아도 좋으니 / 시원하게 트인 / 푸른 것들이 보이는 / 자그만 창문을 갖고 싶다.. 담쟁이 넝쿨처럼 얽힌 절망과 희망을 색칠한 " p85<꿈의 창문>

 

회색빛 감도는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금새 머리가 무거워진다. 파아란 하늘이 보고 싶고 푸른 숲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담쟁이 타고 넘는 벽 사이로 조그맣게 난 창문에 기대어 속 시원한 바깥을 내다보고 싶다.

 

"헤어진 애인보다 계단이 무서워...비 오는 날, 버스에 빈자리가  없으면 / 예술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아...편안한 의자가 베스트 프렌드보다 간절하고..."p88 <50>

 

분명한 기억으로 40대와 50대의 체력은 완연하게 다르다. 詩를 읽고 있으니 그때 그 느낌이 통째로 와닿는다. 60대인 지금은 50대의 충격을 교훈 삼아 순리로 받아들이고 쓸데없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작품이다.

 

"왜 떠나려고 해? / 나도 모르겠어 / 이유를 알고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p100<여행>

 

여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렌다. 이유가 있을까 싶지 않다. 그저 떠나고 싶다. 이 삶이 등 떠미는 것 같다.

 

* 詩가 아름다움만 노래할 수 없다. 고발하고 싸우는 것도 詩의 역할 중 중요한 대목이다. 늘 천국을 노래할 수도 없고 지옥의 존재도 알려야 한다. 이런 면에서 최영미 시인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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