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독서일기 : 인간이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잘못인가?(마이클 샌델의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중에서 나오는 한 꼭지 글을 읽고서) 1

무주이장 2021. 6. 25. 13:57

독서일기 : 인간이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잘못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중에서 나오는 한 꼭지 글을 읽고서) 1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본능일까? 아니면 이성일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익일까? 아니면 도덕일까? 정치는 도덕의 현실화일까? 도덕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정치일까? 정치에는 철학이 있을까? 결론은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철학과 도덕이며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정치 좀 잘했으면 좋겠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치와 도덕을 말한다에는 그의 글들이 모여 있다. 그중 한 꼭지의 글이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있어 유대인과 유대교의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이 있어 정리를 해본다. ‘인간이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잘못인가?’라는 제목의 글이다.

 

 현대사회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일들이 많아졌다. 과학이나 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유전자 변형 식품, 동물 생체공학, 인간 복제, 새로운 생식 기술, 자녀의(또는 자기 자신의) 유전적 특성을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에 관하여는 논쟁들이 많다. 그중 과학이나 기술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 인간 신격화에 해당하는 행위가 되는, 즉 신의 역할을 빼앗는 오만한 도전이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하는 논점을 가지고 설명하는 글이다. 저자는 데이비드 하트만이라는 유대인 철학자와 그의 스승인 랍비 조지프 솔로베이치크의 의견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데이비드 하트만은 자기제한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의 여지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제한한다고 하면서 신의 자기제한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시나이 언약이라고 본다. 신이 시나이 산에서 내린 율법은 명쾌하지도 자기해석적이지도 않다. 신은 그 율법에 담긴 의미를 규정하고 판단하는 일을 인간, 즉 학자와 랍비들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계시는 시나이 산에서 완결된 상태로 주어진 신의 말씀이 아니라 수많은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창의적으로 연구되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말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트만은 두 가지 형태의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하나는 해석적 다원주의, 다른 하나는 윤리적 다원주의이다. 전자는 박학다식한지에 관계없이 각각의 랍비들이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고, 후자는 신이 유대민족과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오로지 유대교만이 신을 숭배하는 진정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또 반드시 신의 계시를 기반으로 윤리체계를 확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는 주장이다. 인간이 신의 계시 없이도 이성을 통해 도덕적 체계를 세울 수 있다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통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속적 도덕 체계를 부정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트만에게 종교란 윤리적인 계율이나 전례, 의식 그 이상의 무언가다. 하트만의 언약적 신학의 중심에는 종교인류학의 근본적인 질문들이 놓여 있고, 이에 따른 많은 질문들이 있다. 이 질문들이 암시하는 것은 종교인류학은 형이상학적인 동시에 규범적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주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영역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며, 신 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하트만의 종교인류학은 오늘날 공공담론에서 갈수록 부각되고 있고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적 원칙이나 윤리적 훈시에 호소하는 방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련의 도덕적. 정치적 문제들을 고찰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식과 유용한 언어를 제공한다고 저자는 설명하면서 본론을 시작한다.

 

생명공학과 신격화 논란

 

자연에 대한 인간지배력의 행사가 제한을 받는 것은 자연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문제 때문이다. 불멸의 생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을 복제하는 일이나 우리의 기대와 욕구에 부응하도록 자녀의 유전자를 변경하는 일이 잘못이라면, 그 죄는 자연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나 기술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 인간 신격화에 해당하는 행위가 되는, 즉 신의 역할을 빼앗는 오만한 도전이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과거 랍비의 시대에는 의사의 치료 행위를 치유자로서의 신의 역할을 침범하는, 용인할 수 없는 행위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탈무드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의사에게는 치료의 권한이 허락되어 있다고 가르친다(베라코트 60a)

 

하트만의 스승인 랍비 조지프 솔로베이치크는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곧 인간이 창조 행위에 참여한 임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 적극적인 권한을 갖고 세계를 개선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신이 일부러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종교인류학에 담긴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은 인간의 무제한적인 자연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겸손이라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토록 큰 권한을 부여받은 자주적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솔로베이치크는 인간이 신의 창조 능력만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데도, 패배를 받아들이는 모습까지 모방했기에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지 않는다고 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대립되는 성향들에 의해 갈라진 종교적 인간은 극단적으로, 다른 다음 두 가지 영적 감수성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다. 자연과 마주할 때, 인간은 강렬한 지배 욕구를 나타낸다. 한편 신과 마주할 때, 주체적인 자아 인식 대신 아브라함과 같은 절대적인 희생과 복종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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