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 세계사
이름만 들어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고등학교 친구 둘, 그리고 대학을 같이 다녔던 친구가 둘 있다. 60이 된 나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단지 글로써 만났지만 박완서 씨가 나에게 따뜻함을 주는 또 다른 사람이다. 세상을 사는 지혜를 지나치듯 가볍게 알려주지만 귀에 쏙 들어오게 하는 재주는 선한 마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런 심성이 부럽기는 하지만 내가 갖기에는 주제넘게 과욕을 부리는 일이리라.
2000년부터 2018년까지 출간된 박완서 씨의 에세이를 골라내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다. 글이 길게는 20년 전에 쓰였지만 오늘 읽어도 숨결이 살아있다. 어제 쓴 글을 오늘 읽어도 부끄러운 경우가 많은 경험을 가졌던지라 신기하기만 하다. 고인을 기억하고 그의 생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어 읽는 동안 같이 가슴 아파하기도 했고 조그맣게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리운 사람이다. 책 속 그녀의 글을 몇 줄 옮긴다.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건 억지다.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심심해하지 않는 게 평화가 아니라 그런 일이 입김 속에서, 즉 사랑 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활발하게 일어나는 게 평화가 아닐는지(사랑의 입김, 2000년 출간)
(남편과의 사별 후 남편이 좋아하던 장어구이, 그 굽는 냄새도 싫었고, 호의를 베푼 사람을 생각해 한 입 먹었으나 토할 뻔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혹시 그걸 먹을 수 없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음식이 나오자 건강한 식욕을 느꼈고, 그 옛날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달게 먹었다. 그리고 남편을 떠나보낸 고통이 순하게 치유된 자신을 느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시간은 신이었을까. 2012년 출간)
2011년 1월 22일, 가을과 함께 곱게 쇠잔하고 싶다는 글을 남긴 작가는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했지만 가을을 넘기고 이 세상 짐을 챙겨 소풍을 떠났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아들의 청둥 기둥 같은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손바닥의 아픔으로 아드님을 만나는 소풍길이었길 바란다.
'매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19 관련 기사의 행간 (0) | 2021.05.06 |
---|---|
책 읽는 중 : 기도하고 통곡하며, 이찬수 목사, 규장 (0) | 2021.04.27 |
시사in읽기 : “우리는 함께 성공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특파원 (0) | 2021.04.07 |
독서 후기 : 이승우, 마음의 부력(2021 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0) | 2021.04.05 |
층간소음 대처법 2 (0) | 2021.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