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도신경 유감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누가복음22:54전단, 63-65절, 71절)
예수님이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는 초기를 설명하는 성경의 구절입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그때입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희롱과 폭행을 당하시고 공회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상황이지요.
사도신경을 예배 전 성도들과 같이 봉독하는 시간마다 제게는 자꾸 거슬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같이 보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제가 거슬리는 부분은 작은따옴표로 지적되고 미움받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인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결코 유대인을 결집시켜 무장투쟁을 하자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셔서 천국의 교회를 이 땅에 굳건히 세우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에게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서부터 박해와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 시작을 지금 누가복음이 생생히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가 고난을 준 것으로 기술합니다. 설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선동하고 조작하고 로마 총독을 압박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을 모르고 이렇게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동족이 고발하고 동족이 처벌을 요구하는 상황, 이를 거절하면 유대인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정치적 압박 속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법정에서 구출할 수 있는 선택권까지 주었건만 유대인 동족들은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혼자서 책임을 지는 것이 억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도신경이 정해진 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이 정해준 것이라고 하기에는 죄인들을 규정하는 규범이 매우 차별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주장하는 참감람나무(로마서11:17) 유대인들에 대한 문책이 사도신경에 없다는 것은 유대인 선민사상을 두둔한 것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글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글의 선명성면에서 보면 ‘같은 동족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으사 본디오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의 문장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문장을 비교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강한 정치권력을 지닌 이방 로마인 총독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그림의 보색 대비 같이 뚜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같은 동족에 의해 고발당하고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이 더욱 처절해 보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방인과의 전란보다 더 처참한 것 같이요.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구절에 대한 해설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는 빌라도의 사형 판결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뜻으로 ‘고난을 받으시고’로 번역한다. 빌라도에 의해서 직접 육체적인 고난을 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법원 판결문에 빗대어 말하면 위의 해설은 다수 재판관의 판결문입니다. 그러나 소수 재판관의 판결문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판결은 비록 본디오 빌라도의 권한에서 형식적으로 나왔지만 빌라도의 법정에서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빌라도의 재판정에 입회한 유대인 다수의 군중들이 총독의 지배에 반기를 들 수 있다는 의도를 인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 강박에 사로잡힌 점과 빌라도가 수차례 판결을 거부하고 심지어 바라바와 예수님 중 한 명에게 면책권을 행사할 테니 유대인들 스스로 면책자를 선택하라며 유대인들에게 스스로 결정권을 위임한 점을 감안하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 잘못이 있다.
초신자가 사도신경에 유감을 표하는 것은 면피의 논리가 성경에서도 보여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가혹한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기에 면피로 보이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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