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뿐(시편 62:1-12) (1)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9-10절)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실과는 상관없이 값없이 주신다고 배웁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안고 대속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물론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현실의 생각과 행동이 계속 선해야 구원을 주신다고 한다지만 우리 개신교는 그렇게 배웁니다. 왜 이런 교리가 생겼을까 궁금하던 차에 마이클 샌델의 책을 보다가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고 합니다(사실 서양의 사상사에서 신학을 뺄 수는 없을 것입니다)
1.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2.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더 정당해 보이는 이유는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 얽매이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보면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인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습니다.
1. 신은 정의롭다.
2. 신은 전능하다.
3.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지는 것이지요.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월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하며, 이때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런 해답을 지지했던 사람으로 5세기 영국 수도승 펠라기우스가 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일부 주석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해답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며 최고의 은사,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스스로 얻어낼 만큼(비록 선행과 계율에 맞는 삶을 살아야겠지만) 자족적이라면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내려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행동은 능력주의를 다시 불러들입니다. 교회의 예식과 절차들(세례, 기도, 미사 참석, 성사 참례 등등)은 그것들이 참여자들에게 일정한 효과를 주지 않는다면 계속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점수를 딸 수는 없다는 믿음을 오래 유지하기란 어렵겠죠? 신앙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되고 교회의 복잡한 예식들로 전달. 강화될 때, 감사와 은총의 신학은 피치 못하게 자부심과 자기 구제의 신학으로 미끄러져 내립니다. 이것이 적어도 마르틴 루터가 자기 시대의 로마 교회를 보고 내린 결론이라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저항은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일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자들이 구원을 돈으로 사는 부패한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지요. 그의 보다 폭넓은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기도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고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능력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후계자들에게 치열한 능력주의 윤리의식을 가져왔습니다.(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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