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뿐(시편 62:1-12) (2)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9-10절)
루터처럼 청교도에 큰 영향을 미친 장 칼뱅은 구원이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의 실적이나 자격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단죄받을지는 예정되어 있다고 하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면서도 그것은 은총을 받기 위한 수단이 전혀 아니다고 했습니다. 칼뱅의 예정론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압박감을 주었습니다. 사후에 가게 될 자리가 이 세상에서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긴다면, 자신이 저승에서 높이 오를지, 낮게 처박힐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베버의 설명에 따르면, ‘내가 과연 선택받았을까?’ 하는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뱅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의식을 만들어냈고,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생각으로 달립니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돈을 벌어 마음껏 써보려고 일하는 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의 일탈이며, 일종의 부패로 여겨졌습니다. 칼뱅주의는 근면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습니다.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도록 절제하는, 이런 규제된 접근이 부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설명합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포인트는 능력과 은총 사이의 고조된 긴장에 있습니다. 평생 묵묵히 일한 삶, 그것은 분명 구원의 티켓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장본인이 (이미) 구원받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는 될 수 있다.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속적 행동을 구원의 증표로 여기는 관점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관점으로 미끄러지는 일을 방지하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칼뱅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합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속적 활동으로 자신의 구원 여부를 증명하는 일을 통해 능력주의는 복귀합니다. 베버는 “선택된 자들과 성스러운 자들에게 주어진 은총을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들은 그 이웃들의 죄에 대해서도 일정한 태도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약한 자들’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동정적 이해가 아니다. 신의 적으로 영원히 정죄받은 자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다”라고 말합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됩니다. 이런 윤리의식은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과 함께,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는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초래합니다. 은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상이 마이클 샌델이 신학이 능력주의의 부활에 작용한 관점을 설명한 것입니다. 시장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천민자본주의로 비판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비판은 시장자본주의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 듯, 오늘의 세상은 어떤 식이든 이기면 된다는 그래서 생기는 이익은 내가 성공의 징표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으로 저열해졌습니다.
LH공사의 직원과 공무원들의 일부가 개발정보를 이용하여 부동산 투기를 해서 정부가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LH의 직원이라는 자들은 ‘아니꼬우면 니가 입사하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아무리 수사해도 시간이 지나면 태산명동 서일필’이라며 향후의 결과를 전망하며 조롱합니다. 내가 어떤 짓을 하던 나에게 이익이 생기면 당연하다는 발상이며 이익을 만드는 행렬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하라는 말일 겁니다. 사실 LH사건을 보면서 일반인들의 분노를 ‘자신들도 하고 싶었던 투기이고 돈 버는 일인데, 나는 빠지고 저들만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도 일부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사회의 부동산 투기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개발정보를 이용한 토지투기나 아파트 가격담합, 자전거래, 신고가 조작을 위한 거짓 거래 등의 여러 방법에서 확인할 수 있듯 만연해 있습니다. 우리는 아파트 가격의 폭리를 엄격히 다스리는 대신, 내가 산 아파트의 가격만 오르면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는 투기를 못하는 사람들이 바보로 보입니다. 투기를 못해 '벼락거지'가 되었다는 발상까지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판국이니 LH직원이라는 것들이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남 잘되는 꼴을 못 봐요!' 이런 심뽀가 합리화되는 겁니다.
다윗은 재물이 늘어도 마음을 두지 말 것을 노래합니다. 나의 재물이 늘었다고, 부자라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시하고 경멸하며 포악한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살다 보면 간혹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은 속임수니 무겁고 중요한 듯한 일들도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볍다고 느껴지기에 다윗은 슬퍼합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이 중세를 통과하면서 인간의 속성이 가진 한계로 인하여 '구원은 나의 능력 덕'이라고 변질됩니다. 이런 변질은 오늘의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시편이 주는 묵상이 이토록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이르니, 잡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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