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 뽑기 아르바이트 정서 2.
아이의 부드러운 손이 귀밑 가를 스치며 새치를 찾을 때면 스르륵 잠이 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 나이가 사십을 넘으면서 하나씩 나오는 새치를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손으로 뽑는 것은 가는 세월에 맥도 추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해 무력감까지 느낍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낭패 본 사십대의 모습은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용돈이라도 쥐어 주고 싶은 마음에 새치 하나에 백 원이라고 얘기하지만 아이가 “싫어요”라는 대답을 혹시라도 할까 봐 마음은 조마조마합니다. 그러니 선뜻 나서는 아이가 고맙고 그런 아이에게 폼 나게 용돈을 줄 수 있는 모습에 자신감을 회복하는지도 모르지요.
아이의 부드러운 손이 새치를 고르려고 머리카락을 일일이 수색할 때 두피를 자극하는 부드러움과 머리카락이 세워지고 다시 눕는 소리가 사락사락 들리는 듯 세상이 고요합니다. “찾았다” 아이가 기뻐할 때의 소리가 가슴을 두드리며 ‘내가 저 애를 낳고 길렀구나’라며 스스로 감탄하며 기뻐합니다. 따끔, 두피를 빠져나가는 새치를 느끼며 머리카락 한 올의 세월을 비킨 듯한 뿌듯함도 가집니다. “엄마, 미안 검은 머리도 뽑았네.” 아이가 던진 낭패감과 미안함에 다시 부서질 뿌듯함이지만 이렇게 아이와 가까이에서 서로의 호흡과 감정과 손길을 나누고 일의 성취감과 열패감을 공유하는 것도 잠깐이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행복을 나도 옛날에 어머니에게 주었을까 묻고 싶지만 어머니는 옆에 없습니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지 않아도 홀연히 사라지는 세월 속에서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습니다. 아이의 손을 빌리기 보다는 염색약을 택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가는 세월이 한 올 씩 가져간 머리카락이 더 이상 새치가 아닌 흰머리를 뽑기에는 가진 밑천이 없습니다. 새치 뽑는다고 대머리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이제는 느낄 수 없는 아이의 손길을 미용실에서 가끔 느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의 두피와 머리카락이 가지고 있는 다른 이의 손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것일 뿐, 나의 머리를 만지는 사람과의 정서의 공유는 아닙니다. 만약 아이가 헤어 디자이너가 되었다면 달라졌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아이가 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 비록 의자에 앉은 사람이 어머니라고 해도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세월을 많이 산 우리들이 체념하면서도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세상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나의 아이가 나의 어머니처럼, 그리고 나처럼 아이의 손길을 통하여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가 우리 사이라는 그런 진한 감정을 느끼고 늙어서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기대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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