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묵상과 적용:묵상은 했는데 적용이 안 돼요

무주이장 2019. 1. 3. 13:50

저는 종교의 가르침은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남을 소중히 여겨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굳게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단 종교가 사랑을 거부하고 폭력이나 사랑 이외의 다른 방법을 조장하는 과정이나 결과를 인정한다면 저는 사익을 위한 사이비 종교라고 믿습니다. 소위 종교라 불릴 수 있는지 판가름하는 저의 기준입니다.

 

 현실의 기독교회의 모습은 타락한 우리를 치유하기 보다는 더 부끄러운 모습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묵상과 적용을 잘못한 교회를 봅니다. 교회 밖의 사람은 이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없으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역지사지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불신지옥을 외치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서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보지 못하고 남에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역겨운 모습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와 성경의 변혁능력이 거부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묵상과 적용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입니다.

 

 김기현 목사님의 묵상과 적용에 대한 이 글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글을 요약합니다(매일성경 2018 11/12월호)

 

 

묵상과 적용 : 묵상은 했는데 적용이 안 돼요

 

                                                                                                                                   김기현 목사(로고스 교회 담임, 로고스 서원 대표)

 

  1. 적용이 잘 안 돼요

    억지로 적용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읽으라라고 하십니다.

     

  2. 나의 적용 실패담

    적용하는 것에서 탈이 났습니다. 거의 한 달 동안의 적용이 대동소이했거든요. 나중에는 지치고 지겨워서 관두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할 것 같아 다시 시작하고, 적용이 매번 비슷하고, 적용한 대로 안 하니까 죄책감만 쌓여서 그만두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편 1:2의 진실, 곧 묵상이란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렇게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적용이고, 그렇게 읽으면 자연스럽게, 얼마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삶에서 우러나고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서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는 족쇄에서 풀려났다고 합니다. 

     

  3. 적용은 필수인가요?

    적용 없이 묵상 없다!  묵상 없이 적용 없다!라고 외칩니다. 묵상의 궁극은 실천입니다. 실천되지 않는 묵상은 묵상이 아닙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2:22)

     

    또 하나 묵상과 적용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묵상은 반드시 육신을 입어야 하고, 아니 육신이 되어야 하고, 육신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타인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곧 그 살아계신 그분의 현존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다차원적 읽기와 교차 적용

    적용하면서 절대 피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남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릇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보아야 하고,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방법은 다면적으로 묵상하고 정반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욥기의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욥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욥의 친구들 자리에 두기도 해야 합니다. 바울 서신의 경우, 우리는 바울이 되었다가 바울의 적대자도 되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정반대의 자리에서 보는 역지사지의 자세입니다.

     

  5. 적용을 잘못했을 때

    틀릴까 무서워서 아예 해석을 하지 않고 적용을 안 하니, 차라리 엉성한 해석이라도 해보고, 부적절한 적용이라도 해보는 것이 열 배, 백 배 낫다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격려하는 이유가 뭘까요?

     

    첫째, 적용이 틀린 것인지, 다른 것인지는 따져봐야 합니다. 사람은 삶의 자리도, 살아온 내력도, 사는 환경도 다릅니다. 이들이 같은 본문을 읽었다고 해서 같은 적용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성경의 풍부함을 인식하지도 못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 다양한 적용을 서로 대조하고 마치 퍼즐을 맞추어가듯, 한 본문에 대한 큰 그림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둘째, 그 적용 한 번으로 그의 영혼이 잘못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과감하게 죄를 지어라를 살짝 패러디한다면 과감하게 틀려라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저주가 경건한 사람들의 할렐루야보다 더 즐겁게 들릴 것이다라는 루터의 말을 바꾼다면 하나님은 잘못된 적용이라도 살아내기 위해 적용하는 죄인을 단 한 번도 적용에 실수하거나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잘못된 적용을 나무라는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렵니다.

     

    셋째,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그의 영혼을 힘들게하고, 다시는 묵상을 안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정색을 하고 엉뚱하게 적용했다고 지적하면, 꾸지람으로 들리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집니다.

     

    넷째, 저는 공동체의 힘을 믿습니다. 개인 묵상은 반드시 공동체 묵상과 함께 가야 합니다.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각자의 나눔을 하면, 말하지 않아도, 애써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틀렸다는 지적을 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나 홀로 동떨어진 채, 주 안에서 어떤 사귐이나 교제도 없이 성경을 읽으면 말씀의 의도와 맥락과 무관하게 적용하기 십상입니다.

     

    다섯째, 성경의 능력을 믿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보다 말씀의 변혁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하고 깊다고 믿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주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비틀고 악용한다 하더라도, 말씀은 그런 우리를 오래 기다려주고,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를 바꿀 것입니다. 그래도 바뀌지 않고 계속 의도적으로 뒤틀어 오용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실수하며 배웁니다. 이 세상에 실수와 실패을 경험하지 않고 배우는 것이 있을까요? 단언컨대 없습니다.

     

  6. 말씀은 밥이다

    큐티는 밥입니다. 묵상이야 말로 밥 먹기입니다. 오늘도 성경이 좋아서 하루 종일 중얼중얼 읊조리다 보면, 깊이 우려낸 맛에 심취할 것이고, 내 몸의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고, 마침내 그 말씀이 내 영과 맘과 몸을 빚어낼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날이 오기까지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대의 적용입니다. 성경을 읽는 당신이 바로 성경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