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자로 본 창세기 주장이 주는 역설
유튜브를 듣는 것은 아침 출근길에 듣다 끊어진 뉴스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이어폰을 꽂고 방송을 들으면서 일을 하다보면 뉴스가 끝난 지도 모른 채 다른 내용이 이어집니다. 김명현이라는 사람의 교회 강연 내용을 듣게 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내용의 대강은 중국문자 속에 창세기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대홍수 사건 이후 살아남은 8명의 인류의 조상이 전 세계로 이동하여 창세기의 사건을 증거하는 것들을 문화 창조물에 상징하여 남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로 중국문자인 한자를 설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아마 한자 외에도 전 세계에는 창세기가 사실이라는 증거가 포함된 상징물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교회를 다닌다며 근황을 소개하였더니,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분이 하시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처가 탄생하신 시기가 BC565년쯤이고 예수가 BC6~7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아마도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인도 어디쯤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배워 왔을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 중 부처님의 말씀과 비슷한 내용이 많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불경의 내용과 비슷한 느낌의 표현이 보이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의 속내는 누가 누구를 가르쳤다며 우쭐한 느낌으로 반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발 달린 짐승이고 생존을 위한 자연적이고 인위적인 이동이 많았으니 여기저기 인종이 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현상이 다반사였으니 단일 민족이라며 인종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별하고 희귀한 현상이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순수성과 편협성은 역사에서는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순수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잔인성이 통제되지 않은 채 비참한 사건을 만들기도 많았습니다. 소위 인종청소라는 사건이지요. 끔찍합니다. 이런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배타성입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이 너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중국문자 속에 창세기 이야기가 가득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창세기를 못미더워하는 신자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서라면 좋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다른 민족의 문화와 믿음에 대한 배타성의 수단이라면 곤란합니다.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가 사람이 섞이듯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럴듯한 몇 개의 증거로, 주장하는 근거가 출간된 종이책에서 얻은 것이라고 일방적인 주장으로 배타성을 키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과 불경의 몇 구절이 비슷하다고 해서 예수가 부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냐고요? 그것도 모르세요?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은 심판을 하려 함이 아니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들이 언제 다시 하나님 곁으로 오실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꿋꿋이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 그런 종들이 주인을 빼고는 다른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서로가 사랑하며 하나님을 따를 뿐입니다.
가만히 성경을 들여다 보면 사람을 배역하는 자는 예수를 배역하는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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