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정리 ‘오늘 살 힘’ 이 찬수목사 저 규장 출간
PART1 부흥, 오늘을 사는 힘
1. 다시 살리신다(하박국서 3:2)
-부흥이란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다. 단지 교회의 교인 수가 늘었다고 쓰는 말은 아니다.
-부흥의 첫 단추는, 하나님에 대한 의혹, 하나님에 대한 의심,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마음들이 풀리면서 흔쾌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무능함과 무기력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무기력을 자각하는 ‘밤 사경’(마태복음 14장)은 진정한 부흥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부흥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누가 부흥을 주도하는가 하는 ‘주도성’의 문제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육안으로 보기엔 희망이 없는 것 같은데,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부흥이다.
2. 나에게서 시작된다(창세기 35:1~3)
-하나님이 주시는 그 무엇에 관심 있던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옮겨 가는 것 이것이 부흥이다. 부흥은 벧엘(=하나님의 집)에서 엘벧엘(=하나님의 집에 거하시는 하나님)로 옮겨 가는 것, 하나님의 집에 있던 관심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시는 하나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흥과 관련한 세 가지 요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배후에서 주도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면 ‘부흥’이고 인간이 주도하면 ‘사이비’이다. ‘하나님의 그러나’ 앞에 ‘내 자아의 그러나’를 굴복시켜버리니 내 인생에 갈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2. 묵상과 침묵이 필요한 ‘고난의 광야’가 부흥을 만드는 두 번째 요소이다. 물론 부흥에 동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 부흥의 출발은 다 정적이다. 광야의 고독이요 침묵이요 묵상이다.
3. ‘예배의 회복’은 부흥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부흥의 순간엔 예배의 회복이 있다.
3. 아직 소망이 있다(에스라서 10:1~5)
선한 영향력이 확산되는 부흥이 되기 위한 대안 3가지
1. 본질의 회복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이 세상의 악한 영향력의 고리가 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부흥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2. 선한 영향력이 확산되는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선 ‘함께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각성의 확산’이다. 부흥은 다른 누구로부터가 아닌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부흥이 나에게서 끝나면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된 부흥은 확산되어야 한다. 흘려보내야 한다. 에스라가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3. 선한 영향력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희망의 확산'이 일어나야 한다.
4. 부끄러움을 아는 것(열왕기하 22:8~13)
-부흥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빛 되신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아가는 게 부흥이다. 강렬한 빛 되시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다 보면 세상 사람들은 가책없이 넘어갈 작은 죄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 된다. 요시야 왕이 경험한 것처럼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많다. 그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을 영적으로 민감한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서게 하는 기회와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1907년 평양대부흥 장대현교회 길선주 장로님의 고백사건)
-부흥을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
1. 부끄러운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본문에서 발견하는 요시야 왕의 귀한 모습이 하나 더 있다. 요시야 왕은 율법책을 발견한 후 옷을 찢으며(옷을 찢는다는 것은 극심한 고뇌를 나타내는 고대의 표현이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표현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요시야 왕의 잘못이 아니다. 요시야 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은 “우리 조상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갔다. 윤동주 시인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모습은 없었다고 한다.
2. 부끄러움을 자각했으면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5. 내 안에 심겨진 씨앗(열왕기하 23:24,25)
-다행히 아직까지는 결정적인 실수를 한 적이 없고 사고를 친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씨앗이 심겨져 자라고 있는지 민감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내 인생의 반응을 만들어낸다(QT의 본문 말씀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이유다)
-요시야 왕의 부흥운동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
1. 그는 마음이 담긴 신앙생활의 회복을 갈망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2. 요시야 왕의 부흥운동은 근원적인 문제를 제거하려고 몸부림쳤던 운동이다.
3. 요시야 왕의 부흥운동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부흥운동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오직 은혜’한 무엇인가? 내 행위로서가 아니라, 자격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깊을수록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PART2 돌이킴, 부흥의 시작
6. 무너뜨릴 때 다시 세워진다(역대하 7:14)
-부흥의 높이는 회개의 깊이로 결정된다(프랭크 바틀맨) 회개는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울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렇다.
-세 가지 회개
1. 메타멜로마이 : ‘뉘우치다’란 뜻을 가진 단어로 주로 감정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단어이다(가룟 유다의 예수를 판 것을 뉘우치는 것이 그 예임)
2. 메타노에오 : 내적인 변화, 즉 마음을 돌이키는 생각의 변화를 강조한다. 단지 메타멜로마이와 달리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3. 에피스트레포 :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어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메타노에오가 생각의 변화를 강조하는 단어라면, 예피스트레포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삶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어가 어우러진 게 베드로의 회개이다.
-가룟 유다는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할 짓을 저질러서 망했고, 베드로는 그보다 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게 아니다.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죄의 무게로 따지면 별반 차이가 없다. 이것은 회개의 차이다.
-부흥의 전제조건인 회개의 의미
1. 회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각하는 것의 문제이다. 사실을 자각하는 게 회개다.
2. 회개는 옛 자아의 파괴의 문제이다.
7. 아비의 소원(출애굽기 20:1~6)
하나님은 왜 우상숭배의 문제를 이토록 심각하게 생각하시는가? 그 이유 세 가지
1.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문제다. 몰라서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이다.
8. 모르면 망한다(호세아서 6:1~6)
호세아서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중요한 두 가지 통로를 살펴보자. 물론 이것 말고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이 무수히 많지만 여기서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결정적인 두 가지 정도만 정리해보자.
1. 가장 강력한 통로는 성경 말씀이다.
2. 삶 속에서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하는 태도이다.
PART3 약속, 꿈꾸게 하는 힘
9. 부흥의 바람이 분다(사도행전 1:6~8,12~14)
-“문제가 생기면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 이것이 초대교회와 사도행전에 흐르는 정신이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면 신앙의 핵심이 달라진다. 그래서 위협이 많아질수록 더 담대해지고, 그 위협과 맞서기 위해 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신앙생활을 누리게 된다.
-말씀과 기도의 조화는 부흥의 두 요소이다. 하나님께선 분명 기도의 상황으로 몰아 가시는데, 여전히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놓친 은혜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기도하지 않음으로 놓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이 문제를 깊이 돌아봐야 한다.
-기도는 변화의 능력을 가져다 주는 도구이다. 기도는 외부의 조건을 바꾸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나의 내면을 먼저 바꾸어 놓는다.
-사도행전은 의사인 누가(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다)가 기록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에 주치의처럼 동행했던 인물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기도를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인정해드리는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2. 기도를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10. 성령과 함께라면(사도행전 2:1~4)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의 첫 부분을 합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예수님이 약속하시되,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 차원에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신 성령님을 경험하기 전에는 사역한다고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님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은 부흥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성령님이 혼미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분이신지 정리해보자.
1. 성령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도록 돕는 분이시다.
2.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해주신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때로는 나의 돕는 자가 되시며, 내가 혼미하여 지혜가 없을 때에는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낙심해 무너질 때면 위로자가 되어 주신다. 그분이 우리 곁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이시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다. 우리 곁에서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근심하지 않고 일하실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11. 꿈이 회복되다(사도행전 2:1~4)
-성경이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을 묘사하는데, 청각적으로는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로 묘사하고 있고, 시각적으로는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성령님의 두 가지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1. 성령 강림 사건이 전적으로 성령님의 주도하심, 그분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졌 음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 같다. 성령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2. 성경이 성령님의 임하심을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임하셨다고 묘 사하는 것은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임하시되 강력하게 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 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주권자 되시는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성령의 부흥이 일어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1. 가장 먼저 언어가 변한다. 예수 믿기 전에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퍼붓고 살았지만, 성령님이 나를 다스리기 시작하면 내 언어가 성령님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된다.
2. 분열된 마음이 하나가 된다. 진정한 공동체라면 각 사람 고유의 생각과 은사와 기질들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주면서 내용물에 있어 통일되는 것이 공동체이다.
3. 약속에 근거한 꿈이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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