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믿음의 성숙은 관계의 성숙입니다.

무주이장 2018. 7. 31. 17:33

믿음의 성숙은 관계의 성숙입니다.


 스스로의 지식을 무기로 생존경쟁의 전쟁터에서 자본주의 전사로 살아온 세월이 어디 한두 해이겠습니까? 전쟁터에서 잘못된 통계로 전략을 결정하려고 하면 작전의 실패는 당연하다는 논리로 반대를 했습니다. 통계가 잘못되면 그로 인한 결정이 과연 실패일까요? 경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정을 하니까요. 그런데도 정책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목이 터져라 싸우느라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젊은 시절, 아내와 아이들이 에어컨을 사자고 하였습니다. 여름의 더위라는 것이 심한 날이 고작 보름정도이므로 구태여 살 이유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름철에 오히려 냉방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 아무리 더워도 긴팔 겉옷을 챙겨 입거나 들고 다닙니다. 냉방이 잘 된 곳으로 들어갈 경우 온도를 낮추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으므로 그러지 못합니다. 어려운 남에게는 호불호도 표현 못하는 나는 가족들에게는 지나치게 나의 호불호를 강요했습니다.


 가족들과 타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공평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가족들이 타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에 서운함을 표현하였지만 저는 가족들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합리성이라는 것은 논리적이라서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이고 확신이라고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면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면 사람은 일관성을 잃어버립니다. 자기를 지탱하는 일관성을 저는 성격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보일 때도 많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성격이 원만하고 합리적이며 사회성이 높은 것으로 그동안 착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케이스들이 모여서 사람들이 인정하는 잣대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나는 그 잣대를 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보편성을 거부하는 특수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보편과 특수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갖고 살았다고 오판을 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믿음의 성숙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만나고 대화하며 같이 감정을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성숙을 봅니다. 믿음의 성숙은 관계의 성숙이라는 말을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나는 분들과의 관계는 얼마만큼 성숙한 것인지를 잴 수 있는 잣대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억지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잣대를 대면서 알았습니다. 세상을 살아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배척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나는 특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랜 세월 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나의 벗들 중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삶을 증명하는 피할 수 없는 증거들입니다. 유유상종이니까요.


 

 남은 세월은 가족들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친척들과 성숙한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성숙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