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목적을 찾아서
결혼을 한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둘의 결합으로 예쁜 아이들도 생기면 더욱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첫 애도 예쁜 딸이었고, 한참을 기다려 귀여운 둘째 딸도 낳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이야기책처럼 행복하게 살면 너무나 좋겠지만 현실에서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부양을 위해 같이 일을 했습니다. 둘이 하는 부양의 의무는 무척이나 보람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 뒀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이었는지에 대한 우리 부부의 판단은 엇갈렸고 잠깐의 갈등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부양한다는 보람을 저 혼자 감당하기에 전보다 더욱 보람찬 하루들을 보냈습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말은 주역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혼자의 수입이 모자라면 어디에선가 필요한 돈이 약간씩 생겼습니다. 아이들을 유복하게 키웠다고 자랑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부족함이 없는 중산층의 아이들로 키웠다고 스스로는 자부를 했습니다. 그런 자부심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 직장을 다니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기에 나의 자부심에 기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가장으로서의 경제활동이 불안하고 궁해졌던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는 도를 넘어갔고 나는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직장을 오래 다녀야 가정을 부양할 수 있기에 직장에서 버티기 위하여 취미를 찾았습니다. 테니스도 치고, 산도 다녔습니다. 처음 주말 동안의 이런 취미생활이 직장을 견디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평일 저녁에도 야간 산행을 하거나 불 켜진 테니스장을 찾았습니다. 테니스 회원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도 테니스장으로 갔다는 전설에 공감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사이 아이들은 아빠 없이 엄마와만 외식을 하고, 큰 아이는 지방으로 전출하여 내가 빠진 주민등록등본(가족등록부)를 학교에 제출하면서 결손가정의 아이로 관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가정을 부양하고 있었으나 아빠는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부양방식에 대해 아내에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아내는 동의도 부동의도 할 수없는 채로 마음이 여위어 갔습니다.
결국 나는 직장을 견디기 위하여 가정을 포기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직장을 다니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굳어진 것입니다. 아내를 배신하는 행위도 아내를 위해서라는 변명을 하는 모순의 상황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나는 애초 사랑하는 가족과 도란도란 함께 살 수 있는 가정을 위하여 경제적 필요 때문에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직장을 지키기 위하여 가정을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내팽개친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상황을 처음에는 인지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잃어버린 목적을 찾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멀어져간 가족들이 다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가정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의로 정한 계획을 따르지 않고 매일매일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계획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뜻의 세부사항을 알려고 한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겠군. 그럼 이제 일을 완수할 수 있겠군.” 그러면 우리는 매일매일 친밀하게 유지하고 있어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실천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헨리 블랙가비/클로드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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